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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유산의 숨결을 찾아
작성일
2006-06-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581

경북 봉화 거촌리 광산 김씨 종택 쌍벽당 오백 년을 지켜온 조선 선비의 얼 경북 봉화 거촌리 광산光山 김씨金氏 종택 쌍벽당雙碧堂 어제 없는 오늘이 없고, 오늘이 없는 내일이 없듯 전통이란 한낱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호흡해 나가야 할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의 전통과 맥을 현대에 어떻게 접목해서 이어나갈 것인가? 봉화 거촌리의 쌍벽당이 그 화두의 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급격한 서구화에 따라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다수 주거 환경이 아파트로 바뀌고 있는 현실에서 전통가옥이란 박제된 표본처럼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렸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주거형태의 대부분이었던 우리의 전통가옥이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전혀 생경한 것이거나 그저 옛것이라는 피상적 관념에 머무르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봉화, 영양, 영주, 청송 등, 경북 북부 지역을 필두로 아직도 몇 군데의 전통 마을이 남아있고, 옛 이야기를 간직한 기왓골 깊은 옛집들도 곳곳에 남아 있으며, 그곳에 살면서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태백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영주를 지나면 서서히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봉화奉化에 이르면 주위는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여 산마루를 넘나드는 구불구불한 길은 오지임을 말해주는데, 그 속에서 아직도 전통이 면면히 살아 숨 쉬는 고가들이 숨어있는 옛 마을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봉화읍에서 동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거촌리巨村里는 기찻길을 끼고는 있으나 소나무가 운치 있는 야트막한 산자락 속에 고즈넉이 자리한 마을이다. 이곳엔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규모를 가진 종택 한 채가 산을 끼고서 자리 잡고 있다. 광산 김씨의 한 맥인 쌍벽당공파의 종가로서 오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바로 쌍벽당雙碧堂인 것이다. 성리학자 김언구金彦球의 풍류가 녹아 있는 곳

쌍벽당 / 가묘家廟
<쌍벽당 / 가묘家廟>
마을 입구에서부터 잘 정비된 안내 입간판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솟을대문과 더불어 너른 입구와 긴 문간채를 가진 당당한 입구를 만나게 된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서 성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 때 사화의 조짐을 느끼고 안동 풍천면 구담으로 들어와 후학양성에 힘쓰던 담암공潭庵公 용석用石은 ‘성균관 진사만은 아니 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치 마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아들인 죽헌竹軒 균筠, 역시 이를 따르며 수양과 후학양성에만 힘썼다. 특히 안동지역의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인보상조隣保相助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천성향약과 안동향약의 기틀을 마련하여 민심의 정화에 큰 역할을 함으로써 안동 사림의 흠모를 받았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1505년경 장인이었던 군위현감의 권유로 이곳 거촌리에 입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들인 쌍벽당雙碧堂 언구彦球는 생원시에 합격하였지만 선조들의 유지를 따라 학문 연찬에 힘쓰고 후진양성과 더불어 이 고장의 식목植木과 미풍양속의 권장에 앞장서서 많은 추앙을 받았다. 이때부터 거촌의 쌍벽당공파가 성립되었으며, 유림에서는 명종 21년(1566년)에 이 쌍벽당 정자를 지어 그의 유덕을 기리게 된 것이다. 대문을 지나 만나는 너른 중정 오른쪽에 쌍벽당雙碧堂이 자리한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비교적 큰 규모이면서 팔작지붕에다 전면의 계자난간이 멋을 더한다. 약간은 막힌 듯하지만 소나무가 보이는 멋진 언덕과 꽤 멀리까지 내다보이는 전경이 좋다. 쌍벽당의 좌측으로는 사랑채인 하루霞樓와 송죽헌松竹軒이 자리하고 있다. 역시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송죽松竹이라 불릴 정도로 뜰에 소나무와 대나무 심기를 즐기면서 거문고를 즐겼던 선비로 잘 알려진 김언구의 풍류가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듯하다.

‘ㅁ’자형 안채 대청마루
<‘ㅁ’자형 안채 대청마루>
입향조(처음 마을을 세우신 어른)가 지었다는 ‘ㅁ’자형 안채 대청마루 앞에는 튼실한 기둥 두 개가 집안의 뒷심을 말해주듯 처음처럼 굳건한데, 들보와 도리 같은 나무 부재들도 매우 단단해 보여 ‘뼈대가 든든한 집’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또한 오늘날의 살림살이로 따지자면 매우 불편한 구조임에도 거의 모든 부분을 고치지 않고서 500여 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사랑채 공간과 경계를 짓는 낮은 담장이 있고, 작은 문을 지나 왼쪽을 보면 단을 높게 설치하여 가묘家廟 영역을 설치하고 있으며, 가묘를 돌아 나오면 역시 너른 중정에 품위 있는 멋을 더한 쌍벽당을 만난다. 이 밖에도 집의 뒤편에 있는 별채와 여기서 가까운 언덕에 있는 또 다른 사묘는 보수공사를 하여 흐트러짐이 없게 해두었으며, 아예 안채의 곁에다 별도의 현대식 건물을 마련하여 찾아오는 가족들이 전통가옥의 불편함에서 자유롭게 해두었다. 후손의 정성으로 이어가는 선조의 맥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정작 더 든든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18대 종손으로 찾아온 이들에게 거리감 없이 자세한 설명과 가르치심을 주고자 하시는 두순斗淳 어르신이다. 아직도 정정한 모습의 어르신은 1954년 봉화초등학교 근무를 시작으로 이곳 인근의 학교에서만 45년간 교직생활을 하시고 1999년에 교감으로 정년퇴임을 하시기까지 이곳 쌍벽당을 떠나지 않고 지키면서 동시에 선조의 유지를 이어받아 훌륭한 선생님으로서 소임을 다하시니 지금도 수많은 제자가 전국 각지에서 연락을 해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에도 당당함을 유지하는 한 집안의 살아있는 전통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1천 평 집안 곳곳에 허물어지거나 생뚱맞게 고쳐진 곳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유가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170호로 지정하여 지속적인 관리를 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두순 어르신 같은 후손에 의한 정성어린 손길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이와 비교하자면 인근의 유명한 닭실마을(유곡리) 권씨 종가와 청암정 같은 곳은 지금까지도 춘양 일대를 상징하는 한 세력가의 고택과 전통마을이지만 겉모습만을 구경하게 될 뿐, 정작 집안의 구석구석과 깊은 역사를 호흡하기에는 어렵게 되어버렸다. 선조의 지혜, 고집과 땀이 어린 전통가옥, 그리고 집안의 역사를 어떻게 하면 오늘에 맞추어 받아들이고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이러한 것들이 앞으로는 필요하지 않은, 그저 한낱 역사적인 유물로만 치부되어 잊혀가고 말 그런 것인가? 청량산 자락이 담긴 맑은 낙동강의 물길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본다. 조희영 _ 우리얼 www.uriu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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