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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쪽물쟁이 정관채, 그가 품은 ‘푸른 씨앗’은…
작성일
2007-09-0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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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빛 바다, 쪽빛 하늘…. 머릿속에서 회색빛으로 잠들어 있던 쪽빛은 정관채 선생의 나주 공방에서 비로소 제 빛깔을 얻었다. 때로는 바다 같고 때로는 하늘 같은 이 오묘한 색은 30여 년을 쪽 염색의 한길을 걸어온 선생의 손톱에도 곱게 물들어 있었다.

굳이 역까지 마중 나온 정관채 선생과 함께 나주 공방으로 향하는 길.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땅과 어우러져 굽이굽이 흐르는 영산강이다. 예로부터 나주가 쪽 염색의 본고장이 된 것도 저 강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이 지역은 비만 오면 홍수가 나곤 했어요. 벼를 심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곳이었지요. 대신 미나리과에 속하는 쪽은 물난리에도 죽지 않고 잘 자랐어요. 쪽 염색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지요. 이 근방은 또 예로부터 목화 농사도 많이 지어서 샛골나이(무명천 직조 기능보유자)가 유명했어요. 쪽물 들인 무명천이야말로 최고의 특산품이었지요.”
나주 토박이인 선생의 집도 대대로 쪽을 키우고 쪽 염색을 했다. 특히, 선생의 외가 쪽은 지금도 ‘샛골나이’라는 무형문화재의 명맥을 함께 잇고 있다. 이처럼 염색과 직조가 발달한 나주 샛골의 고유한 정기를 이어받은 이가 바로 정관채 선생이다. 때문에 그가 대학 시절, 스승으로부터 처음 한 줌의 쪽씨를 받아든 것은 운명, 아니 숙명일지도 모를 일이다.


스승이 건넨 한 줌의 씨앗


 hspace=5 src=일제시대부터 서서히 움트던 산업화의 바람은 1950년대 종전과 함께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상고시대부터 수천 년을 넘게 이어온 한국의 쪽 염색도 값싼 화학 염료 앞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1970년대까지 쪽 염색은 말 그대로 ‘씨가 말라 버린’ 상황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민속학자 예용해 선생은 1978년 자신이 아끼던 제자인 목포대 박복규 교수를 불러 어렵게 구한 쪽씨를 전했다. 박 교수는 자신의 제자 중 나주의 ‘샛골 촌놈’ 정관채에게 이 씨앗을 넘겼다. “반드시 쪽 염색을 되살려 달라”는 말과 함께. 쪽씨를 받아든 순간, 그의 푸르디 푸른 청운의 꿈은 쪽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목화씨를 처음 손에 쥔 문익점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젊은 나이였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우리의 전통 쪽 염색이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쪽빛을 반드시 복원해야겠다는 소명감도 컸고요. 물론 집안에서는 대학까지 간 아들이 힘든 염색을 하겠다니 반대가 대단했지요.”
그러나 어머니 최정님 여사만은 아들의 뜻을 이해하고 묵묵히 쪽 염색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한 번 끊겼던 맥을 되살리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포기와 도전을 반복해야 했다. 재료를 구하는 것도 문제였다. 쪽 염색에 쓰일 굴 껍질을 구하기 위해 정 선생은 밤마다 서울까지 올라와 포장마차 옆에서 몇날 며칠을 지새워야 했다. 이런 끈질긴 신념 끝에 마침내 전통 쪽빛을 구현하는데 성공했지만 사회적인 관심과 경제적인 부는 여전히 멀고 먼 이야기였다.
최근 천연 염색이 각광받기 전까지 선생은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이어왔다. 특히 쪽을 수확해야 하는 삼복더위 철이 올 때면 지금도 ‘내가 무엇때문에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했다. 정관채 선생은 올해 만 평의 밭에 쪽을 심었다. 엊그제 수확의 후유증 때문일까. 그의 허리가 영 불편해 보였다.


자식 키우는 정성 아니면 할 수 없어

‘최연소 무형문화재’. 정관채 선생 앞에 늘 따라 붙는 말이다. 그는 200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이 되었다. 그러나 무형문화재라는 수식어는 그에게 ‘명예’라기 보다 ‘책임’에 가깝다.
“마흔 셋 나이의 쪽물쟁이에게 무형문화재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후대를 키우라는 무언의 압력이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천연 염색의 바람이 불면서 쪽 염색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지요.”
선생이 여름철마다 매년 열고 있는 쪽 염색 학교는 한바탕 축제에 가깝다. 선생이 자비를 털어 전국 각지에서 ‘염색깨나 한다’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기술을 전수하는 자리다. 물론 학생들도 공짜라고 빈손으로 오는 법은 없다. 직접 담은 전통주와 안주, 이와 곁들여진 노래와 춤으로 밤늦게까지 흥성거린다. 그러나 쪽 염료를 만드는 것은 한두 번의 체험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대충 배워서 돈이나 좀 벌어 볼까’ 하는 사람은 열이면 열 실패하는 것이 바로 쪽 염색이다. 정관채 선생은 “자식 키우는 정성이 아니면 쪽 염색을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천연 염색은 쪽 염색 말고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쪽색은 다른 색과 달리 자연에서 바로 재현할 수 없다. 자연 염료에 산화와 환원이라는 화학적 변화를 거쳐 살아 있는 미생물의 발효 작용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 고도의 숙련이 필요하다. 이집트 미이라를 싼 수의가 쪽 염색이었던 것도 쪽 염료만이 수천 년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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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항아리 분의 쪽 염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열 가지가 넘는 변수가 기다리고 있다. 시간, 온도, 날씨 등등 이 중에서 한 가지만 엇박자가 나도 커다란 항아리 가득한 쪽물은 그대로 버려진다. 항아리 100개분의 염료를 만들 때 장인의 마음에 드는 항아리는 1개가 채 될까 말까라니 그 까다로움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현재 정관채 선생이 공방으로 쓰고 있는 집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소박한 황토집이다. 안주인의 알뜰한 정성이 구석구석 배인 앞마당에는 커다란 물항아리들이 즐비했다. 뚜껑을 열자 막걸리 같은 시큼털털한 냄새가 났다. 처음 봤을 때에는 초록에 가까운 색이었는데 선생이 횟대로 힘차게 저어주자 이내 진한 남색 거품이 올라왔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보라 속에 보랏빛이 넘실거린다.
“쪽빛이 제대로 나오려면 바로 이 보랏빛이 꼭 있어야 하지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도 바로 여기서 나온 겁니다.”
쪽 염료 만들기의 시작은 삼복더위 철에 수확한 쪽과 빗물을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는 것부터 시작한다. 20~25˚C에서 48시간을 둔 물에 석회가루를 넣고 횟대로 힘차게 저으면 노랑, 보라, 연두, 초록, 파랑 등의 색으로 변화한다. 이후 침전물만 꺼내 시루에 넣고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뒤 잿물을 만들어 시루에 통과시킨다. 이 물을 25~30°C로 유지시키며 매일  2~3차례 힘차게 저으면, 보름 정도 뒤에 완성된 염료인 ‘꽃물’이 되는 것이다. 꽃물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바로 ‘물발’. 저을 때마다 뒤엉켰다 풀리는 실타래 같은 물발이 서야 진정한 꽃물이라 부를 수 있다.
이 꽃물에 담가진 새하얀 천들은 처음에는 연둣빛을 띠더니 밖으로 나오자마자 푸른 쪽빛을 띄기 시작했다. 꽃물에 담그는 시간과 횟수에 따라 쪽빛은 여름날의 파아란 하늘을 닮기도 하고 짙은 동해를 닮기도 했다. 어느새 선생 집 앞의 빨랫줄에 가득 널린 쪽빛 천들이 잔잔한 바람에 일렁였다. 낯설은 듯 낯설지 않은 푸른색. 이 깊고도 아득한 색을 우리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잊고 지냈을까.


명품 쪽 바지, 쪽 염색 대중화의 씨앗 될까

청출어람. 선생은 ‘제2의 정관채’를 만들기 위해 후진 양성에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선생처럼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 장인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가 청바지를 능가하는 ‘명품 쪽 바지’를 구상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선생은 쪽 바지를 통해 쪽 염색을 몇몇 장인의 전유물인 아닌 일반인의 생활 속에 퍼뜨릴 작정이다.
 hspace=5 src=“100% 천연 염료인 쪽은 색깔도 탁월하지만 아토피를 치료하는 등 약리 효과도 뛰어나 한 번 해 볼만 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쪽 바지의 경쟁력이 입증되면 제자들도 더는 고생시키지않고 마음껏 키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최근 공방 아래에 만든 200평가량의 대형염료작업장도 이런 계획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30여 년전, 그가 뿌린 한줌의 쪽씨가 죽어가던 한국의 쪽 염색을 되살려 냈듯, 다시 그가 만든 쪽 바지가 쪽 염색 대중화의 소중한 씨앗이 될 수 있을까. 손톱까지 파랗게 물든 장인의 거친 손이 깊고 푸른 꽃물을 힘차게 젓고 또 저었다.

글 : 서유상
사진 : 김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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