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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교미술품의 도난과 환수 어떻게 이루어지나
작성일
2024-06-2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0

불교미술품의 도난과 환수 어떻게 이루어지나 지난해 말 통계에서 도난당한 국가문화유산은 3만 점을 훌쩍 넘었다. 문화유산급 별로도 보존 가치가 높은 지정된 문화유산보다 비지정 문화유산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도난당한 문화유산은 곧 바로 유통되지 않고 오랜 기간 은닉되면서 되찾는 비율은 20%에 그쳤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10년인 문화유산 절취범죄의 공소 시효 연장이 꼭 필요한 이유이다. 00.〈합천 해인사 사명당유정 진영〉18세기, 비단에 채색 01.〈대구 동화사 사명당유정 진영〉1796년경, 비단에 채색, 122.9×78.8cm, 보물 02.〈대구 용연사 독성도〉1871년, 비단에 채색, 99.8×73.7cm

불교미술품 도난 사건

불교문화유산의 대부분은 사찰의 소유물이다. 법당에 봉안된 불상과 불화를 비롯하여 석탑이나 승탑 등 석조물, 경전과 공예품에 이르는 불교미술품은 모두 예배와 신앙의 대상물이거나 그 장엄물1)로 제작된 것이다. 이에 재화(財貨)로서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종교성을 전제로 한 불교의 성보(聖寶)이기에 제자리를 떠나서는 의미가 퇴색된다. 


그러나 국가가 힘이 없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많은 사찰의 불교미술품은 외부로 유출되거나 흩어지는 사례가 잦았다. 한국전쟁 이후 도난이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이고, 사찰에 성보박물관이 본격적으로 건립된 것도 1990년쯤이다. 1970년경 그 당시 문화공보부는 ‘문화재를 도굴한 자 삼천만이 고발하자’, ‘문화유산 도굴 막고 해외 유출 방지하자’는 등 다소 원색적인 슬로건을 내걸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도난은 잦았고, 사찰에서는 어떤 유물이 얼마나 도난 되었는지 기록조차 없는 관리 부실과 인식 부족은 심각하였다.


불교미술품을 노린 도난 사건은 조선시대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정시한((丁時翰, 1625~1707) 선생은 1986년부터 3년 동안 전국 산천을 기행하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담은 여행기 『山中日記』에서 “(1686년) 4월 7일 홍제암에 있는 사명당(泗溟堂, 영당으로 추정)에 갔다. 먼저 유정의 비석을 보고서 다음으로 영자2)를 보았는데 진본(眞本)이 아닌 것 같아 의아해서 진본이 있는 곳을 물으니 ‘신해년(1671)경에 진본을 도둑맞아 다시 본떠 그렸고[移模], 뒤에 들으니 부산 왜관3)에서 물건을 내놓아 팔았다’고 하는 사건의 전모를 듣고 사람의 마음이 가히 놀라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팔공산 동화사에 모셔진 또 다른 사명당 유정(泗溟堂 惟政, 1544-1610)의 진영 역시 잃어버릴 뻔한 아찔한 이야기를 전한다. 1973년 어느 날 전각에 걸려 있던 진영이 눈 깜짝할 사이 없어진 사실에 사찰 관계자가 몇 날 며칠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간신히 정보를 얻게 되고, 일본으로 밀반출되기 전에 영정을 되찾아 온 이야기이다.


03.〈구례 천은사 도계암 신중도〉1897년, 면에 채색, 192.3×126.0cm 04.〈신중도〉의 원 소장처를 지운 흔적

도난품, 지우거나 잘라 낸 흔적들

필자는 2021년 여름, 서로 다른 자치단체의 문화유산지정 신청에 따른 현장 실견과 조사 과정에서 도난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불화 2점의 존재를 잇달아 포착하였다. 한 점은 〈독성도〉4)로, 도상의 원형이 잘 남아 있었으나, 화면만 잘라 새로 표구된 점이 의심스러웠고, 다른 한 점은 〈신중도〉5)로, 역시 출처가 기록된 화기 부분만 고의로 지운 흔적이 먼저 눈에 들어 왔으며, 일부 도상에는 덧칠이 확인됐다. 기증을 통한 소장 내력도 개운치 않았다. 


이 몇 가지 사실은 불법 반출의 사실을 입증하는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우선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서 ‘도난국가유산정보’의 신고목록 도난품과 내력을 대조한 결과, 불법반출품으로 확인돼 원래의 사찰도 알 수 있었다. 〈독성도〉는 대구 달성군 용연사의 극락전에 봉안됐던 불화로, 1871년 제작돼 경북 청도 적천사의 백련암에 모셔졌으나, 조선 말 암자가 폐사되면서 용연사로 옮겨졌다.


〈신중도〉는 전남 구례군 천은사의 도계암에 봉안됐던 불화로 조성연대는 1897년이다. 각각 1987년 8월과 2000년 9월경 원 소재지에서 도난당한 불화로 확인됐다. 모든 정황이 도난품임을 파악한 이상 또 다른 정보가 소장자에게 전해지기 전에 서둘러 국가유산청 사범단속팀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경우 소장자는 해당 작품이 도난 물품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사는 급물살을 타 그해 9월 두 점의 불화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불화는 법당에 늘 걸려 있어 외부에 쉽게 노출되고 무게도 가벼워 휴대와 이동의 편리함에 절도범의 표적이 되어 왔다. 아무리 큰 불화도 족자의 장황 부분과 액자의 나무틀만 두고 화면만 오려 내면 접거나 말아서 이동이 가능한 이유 때문이다. 훔친 불화는 임의로 덧칠되어 원형을 훼손하거나, 예리한 칼날로 잘라 유물의 출처를 영원히 숨기기도 한다. 이렇게 화기(畵記)를 오리거나 지워 고의로 손상한 경우 어김없는 도난품일 가능성이 크다. 그 흔적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 장엄물: 부처에게 올리기 위하여 아름답게 장식한 물건
2) 영자(影子): 고승의 초상화
3) 왜관: 조선과의 무역을 위해 일본의 관리와 상인 등이 거주하던 공간
4) 독성도(獨聖圖): 석가모니 제자 중 나반존자를 단독으로 그린 그림
5) 신중도(神衆圖):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는 신중을 그린 불화




글·사진. 김미경 (대구국제공항 문화유산감정관실 문화유산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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