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격정의 바다에 노을이 붉다 강화도
작성일
2008-10-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772



강화의 풍광은 묘연하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평야가 너르고, 푸근한 산줄기가 적당히 이어져 중심에 들면 섬처럼 보이지 않는다. 강화의 성산인 마니산에 오르면 비로소 들과 바다의 풍광이 한껏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갯벌과 인천바다가 펼쳐지고 평야너머 북쪽으로는 북녘 땅이 어른거린다. 긴장감이 느껴질 만도 한데 어찌된 일인지 평온하기만 하다. 북녘과 마니산 사이의 한껏 아늑하게 펼쳐진 평야 때문이리라.

강화를 말할 때 우리 땅의 유구하고도 아린 역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강화는 한민족의 긍지와 회한이 함께 묻혀있는 섬이다. 멀리 5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단군이 제단을 쌓고 천제를 지내던 참성단이 이곳에 있으며, 곳곳의 고인돌 유적들은 선사시대의 오랜 인적을 증명한다. 그런가하면 이곳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던 저항의 섬이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에 맞서 수도를 옮겨와 39년간 처절한 장기전이 치러졌으며, 그 때 팔만대장경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인조에 이르러서는 후금에 의한 정묘호란이 발생하였고 또다시 조정의 피난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어진 병자호란으로 최후의 저항지였던 이곳마저 함락되고 마침내 치욕의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근대에 들어서는 프랑스 함대의 병인양요, 미국 함대의 신미양요, 일본인들의 운요호 사건 등 열강들의 조선침략 발판을 위한 격전지가 되었다. 말 그대로 강화도의 역사는 한국사의 축소판이며 섬 곳곳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은 모두가 격전과 저항의 처연한 흔적들이다. 유난히 붉은 강화도의 노을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한편 섬 남쪽의 동막리, 여차리 해안은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잘 보존된 갯벌로 알려져 있다. 느즈막한 노을풍광은 섬의 서쪽 어느 곳에서 보든지 아름답기 그지없다. 주변의 석모도와 더불어 서울근교의 손꼽히는 낭만주의 여행지로도 각광 받고 있지만 이곳을 찾게 되면 누구든 숙연한 마음 한 자락 지녀볼 일이다. [b]나라의 풍파와 맞서던 저항의 땅, 강화의 국방유적 [/b] [b]강화산성과 고려궁터 [/b]

강화도는 고려시대 39년간의 몽고항쟁이 이루어진 곳이다. 고려궁터(사적 제133호 강화고려궁지)는 몽고를 막아내기 위해 고려왕조가 송도에서 도읍을 옮겨와 세운 궁궐이다. 39년 동안 고려의 중심부가 되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규모는 작지만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졌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인조 때에는 이 곳에 외규장각이 설치되었었는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종종 반환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가 바로 이곳에서 유실된 것이다. 고려궁터는 현재 외규장각이 복원되었으며 조선시대 관아건물인 유수부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강화산성은 원래 내성과 중성, 외성 등 삼중성으로 쌓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내성뿐이고 성의 둘레는 약 1.2㎞ 정도다. 1259년 몽고가 화친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이 강화산성을 허무는 것이었다고 하니 이 성의 듬직스러운 견고함을 알만 하다. 조선 초기에 재축조 되었다가 병자호란 때 다시 파괴되었다. 사적 제132호로 지정되어있다. [b]해협을 따라 둘려진 근대 격동기의 유적 - 진과 보, 돈대 [/b]

강화와 김포 사이의 해협은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해협을 지나면 곧바로 한강을 거슬러 서울에 닿았던 것이다.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고려시대부터 수비대가 상주하고 있었으나 본격적인 군사시설이 들어선 것은 조선 효종과 숙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국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조정은 강화와 김포의 해안 곳곳에 진과 보를 두고 여기에 소속되는 돈대와 포대를 구축했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 사이에 진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갑곶돈대는 1232년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1270년까지 몽고와의 항쟁을 계속하며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서 몽고를 비롯한 침략군들에게는 꼭 넘어야 할 산이었던 것이다. 강화해협의 진지들은 근대 격변기에 접어들며 주요 격전의 장이 되었다. 운요호 사건이 이곳에서 있었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특히 신미양요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 군사들이 전멸할 정도로 처절했는데, 초지진의 성벽과 나무에는 신미양요 때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 강화에는 5개의 진과 7개의 보, 53개의 돈과 8곳의 포대, 8곳의 봉수대 등이 있었으며 현재는 광성보(사적 제227호), 초지진(사적 제225호), 덕진진(사적 제226호)과 소속 돈대와 포대가 남겨져 있다. [b]단군이 제사를 지내던 성산 마니산과 고인돌 유적군 [/b]

마니산(468m)의 원래 이름은 마리산이다. 마리란 머리의 옛 말로 강화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땅, 즉 제일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이 산의 꼭대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사적 제136호)이 자리하고 있다. 참성단은 지름 4.5m의 둥그런 원형기단 위에 사방 2m의 네모난 제단이다. 참성단 제사는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졌으며 지금도 개천절에 단군을 위한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참성단의 존재는 먼 고조선 시대로부터 강화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곳의 오랜 역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또 하나의 유적은 강화도 전역에 분포된 고인돌이다. 모두 80여기가 분포되어 있는데 하점면 부근리의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와 오상리, 삼거리 고인돌군이 볼만하다. 한편 마니산,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의 세 꼭지점으로 불리우는 고려산(436m)은 봄철 진달래 산행과 가을철 억새 산행지로도 유명하다. 낙조봉 정상부에 펼쳐진 드넓은 억새군락과 장엄한 일몰풍광으로 강화 제8경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고구려 장수왕때 창건한 적석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고구려 장수인 연개소문이 태어났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b]강화 제일 사찰 전등사와 문창살이 아름다운 정수사 [/b]

전등사는 온수리 정족산 기슭 삼랑성 안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25대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이 옥으로 만든 등을 하사했다 해서 전등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군량미를 보관하던 군창터가 남아있는 것을 보아 전시에는 기지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대웅전 추녀 밑에 벌거벗은 나신상이 쪼그리고 앉아 처마를 떠받들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전설이다. 광해군 6년에 전등사에 불이나서 다시 짓게 되었는데 공사를 하던 목수가 아랫마을 주막집 주모를 사랑하게 되었단다. 목수는 날마다 일해 받은 품삯을 그 주모에게 맡겨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돈을 갖고 먼 곳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목수는 화가 나서 법당 네 귀퉁이에 벌거벗은 채 처마를 떠받드는 여자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부처의 좋은 말씀을 듣고 여인이 뉘우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전등사에 비해 작은 사찰인 정수사는 마니산 자락 동쪽 산허리에 숨겨져있다.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마니산 참성단을 참배한 후 세웠다. 정수사 법당이 보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꽃무늬가 새겨진 문창살이 특히 아름답다. ▶글 ·사진| 남정우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