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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장 작지만 가장 끈끈한, 가장 오래 가는 골목길
작성일
2014-02-1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292

가장 작지만 가장 끈끈한, 가장 오래 가는 골목길

 

아파트단지에 살면서 무언가 찜찜하고 허전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저녁때 도시에서 집으로 돌아와도 턱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현관문을 신속히 닫아걸어도 도시의 사나운 기운이 따라 들어왔을 것 같다. 다시 아침이 되어 집을 나설 때는 갑자기 도시의 찬바람이 쌩 하고 분다. 밤새 몸에 깃든 집의 온기가 너무도 빨리 증발해버려 당황스럽다.

서로 거리를 두었던 도시와 집이 언젠가부터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만큼 집과 도시를 오가는 시간이 절약되고 편리해진다. 그러나 마음은 오히려 불안하고 허전하다. 도시에서 집이 들여다보이고, 집에서 밖을 내다보면 바로 도시다. 집안에서 벽에 기대 밖을 바라보다 이 벽 너머가 도시라고 생각하면 공연히 불안하다. 도시와 집 사이에 도시도 아니고 집도 아닌 공간, 공(公)도 아니고 사(私)도 아닌 공간, 집과 도시 사이에 있던 그 좁은 길, 골목이 사라지자 일상에서 아늑하고 편안한 마음도 사라진다.

인간, 시간, 공간… 동아시아에서는 ‘사이’를 중요시 하는데, 사이는 관계를 뜻한다. 골목은 말뜻이 중복되긴 하지만, 집과 도시 혹은 마을을 이어주는 ‘사이공간’이다. 집도 사람도 사이공간이 있어야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 골목이 없어지자 공간은 내 것 아니면 세상사람 모두의 것이 되었다. 생활도 공과 사로 날카롭게 나뉘고 공은 더욱 차가워지고 사는 더욱 자폐적이 되었다. 문제는 사람을 남과 가족으로 깔끔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남은 아니지만 가족도 아닌 사람들이 있다. 이제 그들을 만날 곳이 마땅치 않다.

오래된 마을이나 도시의 안길 혹은 큰길을 걷다 보면 나뭇가지가 뻗듯 계속 길이 가지쳐나간다. 담이나 벽을 따라 휘어 돌아가는 그 길들을 엿보면 집들의 대문이 살짝 보이곤 한다. 우리 모두 그런 길을 하나씩 갖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도시의 큰길을 걷다가 그 길로 접어들면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고 학교나 회사에서 겪은 골치 아픈 일도 잊혀졌다. 그 길목에 서있는 오래된 나무를 지나면 차가운 세상은 순식간에 따뜻하고 조용한 곳으로 반전되었다. 그 좁은 길에 낮선 사람은 없었다. 가족이나 옆집 친구, 아니면 마중 나온 강아지가 있을 때가 많았다. 텅 비어있기도 했지만 그 길은 늘 아늑했다. 우리는 그 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밟으며 나이를 먹어갔다.

평생 고향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던 시절, 모여 살던 몇몇 집의 사람들은 같은 골목을 평생 걸었다. 그들은 모두 아침에 그 길을 나가며 각박한 도시생활을 견디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고, 저녁에 그 길로 접어들며 도시의 번잡함을 털어내고 안도감을 느꼈다. 법적으로는 폭이 4m에 미달해 도로 취급도 못 받지만, 골목은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달라지게 하는 장소였다. 그 길에서 이웃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우연이자 필연이고 자연스런 일상이었다. 같은 길을 걸어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서로 친해지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은 평생을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끈끈한, 가장 오래 가는 골목 공동체다.

몇 갈래의 골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한 우물의 물을 마셨다. 우물가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골목 공동체보다 좀 더 큰 공동체를 이루었다. 나는 어린 시절, 찬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날 그런 우물 공동체를 목격했다. 밤잠을 자다가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보니 동네사람들이 골목에 일렬로 서서 물이 든 양동이를 손에서 손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그 양동이의 물은 골목 안쪽 어느 집에 뿌려졌다. 초가에 불이 난 것이다. 번쩍이는 불길이 이웃한 몇 골목을 같이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우물 공동체가 모여 큰마을과 도시가 된다.

골목은 운명적으로 공동체를 이루게 된 몇몇 집들을 공간적으로 맺어주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맺어주는 촘촘한 그물망이다.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에 있을 때 우리는 소속감을 느낀다. 같은 길을 걸으니 외롭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하는 일이 비슷한 사람들이 골목을 같이 쓰기도 한다. 오래된 상업도시 안성에서 골목 공동체는 같은 품목을 만들거나 판매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골목이 다르면 파는 물건이 달랐다. 안성시장의 중심부인 싸전거리에는 질 좋은 쌀을 파는 사람들이, 신흥동에 옹기전거리에는 옹기 파는 이들이 나란히 줄지어 살았다. 골목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상업적으로 서로 경쟁자인 동시에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이웃 골목 공동체의 고객이기도 했다.

인생에 여러 길이 있듯 골목도 가지가지다. 우리 도시를 답사하는 재미는 서로 다른 골목을 탐사하는 데 있다. 도시 답사는 낯선 공동체, 그 삶의 방식을 탐사하는 일이다. 다른 도시를 여행하고 전혀 낯설지 않았다고, 한국 도시는 다 그렇고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큰길 안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작은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

나주에서는 각기 제 이름을 가지고 길게 이어지는 골목들을 만난다. 남도에서는 골목을 고샅이라고 부르는데, 진고샅은 성벽을 동서로 잇는 징그럽게 긴 골목이다. 객사인 금성관 부근에 있던 연애고샅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골목은 길이가 135m로, 다른 도시라면 긴축에 들지만 나주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이와 달리 안동에는 이름 없는 막다른 골목이 무수히 많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기도 하고 조금 더 넓기도 하다. 또 몇 발짝이면 끝날 만큼 짧기도 하고 좀 길기도 하다. 곧게 뻗기도 하고 부드럽게 휘어지기도 한다. 등고선을 따라 평평하기도 하고 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모양이 어떻든 막다른 골목은 푹신한 자루에 담겨지는 듯한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골목 중에서 도 가장 골목다운 길이다. 서양은 물론 중국의 오래된 도시에서도 막다른 골목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통영에서는 나뭇가지 모양으로 계속 나뉘는 골목이 서피랑을 수놓는다. 아래에서 어느 길을 택해 계속 양자택일 하며 끝까지 따라가면 서피랑의 꼭대기에 있는 집 대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나운 개를 만나고 만다. 나는 밀양의 삼문동을 답사할 때 한 골목에서 같은 사람과 개를 여러 번 마주치고는 의아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들도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듯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사람과 개는 제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그 골목을 뱅뱅 돌고 있었던 것이다. 골목이 삼문동을 휘감는 밀양강을 닮아 동그래서 그랬다.

모양이 어떻든 골목은 그 도시다움, 그 마을다움을 간직하며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평평한지, 경사졌는지, 주변에 강물이 흐르는지 하는 땅의 이야기를 전한다. 골목에 매달린 집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대문을 달았는지, 살림집인지, 상가주택인지 하는 집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무엇보다도 골목은 그곳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그래서 골목은 그 도시고, 도시는 그 사람이다.

글 한필원(한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일러스트 김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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