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국민과 함께 하는 문화유산 e-야기
작성일
2006-03-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736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난중일기’라고 부르게 된 것은 정조가 1795년에 이충무공전서를 만들도록 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든 편찬자가 난중일기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지 이순신 장군이 그렇게 붙인 것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의 사후에 자신의 일기가 알려지고 국보로까지 지정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충남 아산시 소재 현충사의 유물전시관에 이순신 장군 친필일기가 전시되고 있다. ‘난중일기’를 통해 본 이순신 장군 이순신의 일기는 초서인지라 한문 전문가가 아니면 읽어내기가 어렵다.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펴낸 ‘난중일기초’는 당시 한학자들이 이순신의 초서일기를 해독하고 간추려 책자로 펴낸 것이다. 이 또한 한문이다. 시중에 나온 이순신 일기 한글번역본 대부분은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를 텍스트로 하거나 노산 이은상의 한글번역본을 따랐기 때문에 제대로 한글로 번역된 이순신일기를 읽을 수 없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이충무공전서의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친필일기의 상당한 부분이 누락되거나 추가되었다. 임금의 명을 받든 신하들은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하면서 왜 누락하거나 추가하였을까? 임금의 눈치를 본 것일까? 아니면, 편찬자 임의로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은 삭제하기도 하고 추가하기도 한 걸까? 국보 제76호(이충무공 난중일기부 서간첩 임진장초)로 일괄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이순신 친필 일기 7권 205매에 없는 기록이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에는 일부 있는 것으로 보아 덕수 이씨 종가에서 대대로 보관 중 친필일기 일부가 분실되었다고도 추정할 수 있다. 서지학자, 한문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후과정을 사실대로 바로잡아 후손들에게 넘겨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1998년 이순신 장군의 400주기에 박혜일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런 사실을 알릴 목적으로 조목조목 지적하며 펴낸 책이 『이순신의 일기』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1597년 9월 15일 부하들에게 훈시한 유명한 ‘必死則生 必生則死’ 구절을 항간에서 즉자를 卽자로 표기하고 있는데, 국가기록유산의 원문텍스트에 따르면 則이 맞다. 이순신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불멸의 정신을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으로 남겼다. 1597년 겨우 사형을 면하고 4월 1일 옥에서 나온 첫 날에 쓴 일기에는 이순신의 면모가 한껏 드러나 있다.

1957년 4월 1일 난중일기 초 1일 맑음. 옥문을 나오게 되었다. 남대문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 과 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 원경遠卿과 더불어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하였다. 지사知事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備邊郞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술을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영공令公 이순신李純信이 술병 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判府事 정탁鄭琢, 판서判書 심희수沈禧壽, 판성贊成 김명원金命元, 참판參判 이정형李廷馨, 대사헌大司憲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동지同知 곽영郭嶸 등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노승석의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발췌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해서 땀이 몸을 적셨다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을 읽으며 오로지 공감할뿐이다. 그리고 이은상의 난중일기 한글번역본과 다른 번역본을 대조해서 읽다가 누락된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특히 주목한 것은 ‘1596년 9월 21일 저물 무렵 무장에 이르러 여진과 잤다.’는 부분이다. 가장 최근 간행된 이순신의 「난중일기 완역본」(노승석 옮김)에 의하면 여진이 계집종의 이름이라고 주가 붙었다. 아마도 여진은 관기가 아닌가 싶다. 임진왜란 중 도체찰사 이원익과 함께 전라도내 각 진영을 순시하고 있는 장군이라도 조선시대 풍속에서 벗어나지 아니한 것 아닌가? 그리고 이순신은 얼마나 정직한가! 그게 성웅 이순신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은상은 한글로 번역하면서 삭제한 걸까? 청향淸香이 감도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 현충사를 가는 사람은 모름지기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450년 전 아산고을 방화산 기슭에 대략 50호 가량의 농촌 마을이 있었다. 이순신은 서울서 태어나 소년시절 부모님을 따라 외가인 아산 백암리 마을로 옮겨 성장한 가난한 청년이었다. 이곳에서 거의 10여 년간 청년 이순신은 선비로 수양하며 오로지 무예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장인의 지도아래 병법공부며 말 타기며 활쏘기를 하다가 가끔 멀리 광덕산을 바라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현충사 경내에서 광덕산을 바라보노라면 청정하고 굳센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청년 이순신이 수양하며 소일했던 1560~1570년대는 그 기상이 더 강했을 것이다. 마침내 이순신은 1576년 12월, 32세에 초급장교로 발령받아 함경도 최일선으로 떠난다. 이후 노량진에서 순국하기까지 공직자로서 일관된 생활자세는 아산의 방화산 기슭에서 청년시절 부단히 수련한 근기根氣에 바탕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닌지 싶다.

이순신은 괴멸된 나라에서 7년이라는 장기에 걸쳐 온갖 악조건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백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활로를 개척하여 나라를 구하였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를 덮을 해군 제독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높은 지위에 있을 때도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었고, 권세를 잃고 백의종군의 신세가 되어도 그 마음에 원망과 타락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 씀씀이에 도가 있었던 것이다.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청향淸香이 감도는 인간 이순신은 후손들이 어려울 때 힘을 얻도록 불후의 명문을 남겼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 이순신이기에 심금을 울리는 글이다. 허영일 / 문화재청 행정사무관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