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국가유산사랑

제목
흑견금니(黑絹金泥)로 표현한 삼청(三淸)의 정신
작성일
2022-11-29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02

흑견금니(黑絹金泥)로 표현한 삼청(三淸)의 정신 보물 이정 필 삼청첩 탄은 이정(灘隱 李霆, 1554~1626)은 세종대왕의 고손으로 왕실 출신 문인화가이다. 묵죽화로 명성이 높았는데, 조선 중기 명문장가인 이정귀(李廷龜)는 “소식(蘇軾)의 신운(神韻)과 문동(文同)의 형사(形似)를 겸했다”라고 평했고, 선조(宣祖)의 부마인 윤신지(尹新之)는 “중국인들이 한 폭이라도 얻으려 값에 한정을 두지 않았으니, 이는 천하의 보배임이 분명하다”라고 극찬했다. 01.보물 이정 필 《삼청첩》 중 <순죽>, 이정, 조선시대, 흑견금니, 1첩 54면, 25.5×39.3cm,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조선 중기 문예의 지향과 역량이 집약되다

왕손으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살던 이정에게 큰 위기가 닥치니 1592년에 터진 임진왜란이었다. 이때 그는 왜적의 칼을 맞아 팔이 잘려나갈 뻔한 큰 부상을 입고 장토(莊土)가 있던 충남 공주로 낙향한다. 그러나 강인한 의지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해 오히려 이전보다 진전된 경지를 개척해 나가니, 1594년에 완성한 《삼청첩(三淸帖)》이 그 증좌이다.


《삼청첩》에는 이정의 주특기인 대나무뿐만 아니라 매화, 난까지 아우른 20폭의 그림과 자작시 17수가 장첩(粧帖)되어 있다. 그런데 흰 바탕에 먹으로 그리는 수묵 위주의 사군자 계열 그림과 달리 먹으로 물들인 검은 비단 바탕에 금가루를 아교에 갠 금니를 사용해 화려한 듯 엄정하고 독특한 미감을 자아낸다. 물자가 귀한 전란 중에 굳이 이처럼 고가의 귀한 재료를 구해 군자나 지사의 절개를 상징하는 소재를 모아 그림으로 담아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어쩌면 부상에서 회복한 자신의 건재함을 세상에 알리고, 선비의 기개와 절조를 의미하는 ‘세 가지 맑은 것’ 즉, ‘삼청’의 정신으로 난세를 극복하고자 하는 다짐과 기대가 투영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작품이 완성되자 이정은 한양으로 올라가 최립(崔岦, 1539~1612)과 한호(韓濩, 1543~1605)에게 머리말과 표지 글씨를 부탁하고, 차천로(車天輅, 1556~1615)에게 제시(題詩)를 받는다. 모두 당대 문예계에서 최고의 성가(聲價)를 얻고 있던 인물이다. 명실공히 ‘일대교유지사(一代交遊之士)’가 동참해 ‘일세지보(一世之寶)’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삼청첩》은 제작 당시부터 문인묵객 사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이안눌(李安訥, 1571~1637), 유몽인(柳夢寅, 1559~1623)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앞다 투어 글을 보태니 《삼청첩》의 성가는 더욱 높아져 갔다. 이처럼 《삼청첩》은 이정 개인의 작품을 넘어 당대 최고 시서화 대가들의 예술적 성취가 모인 종합예술품이며, 조선 중기 문예의 지향과 역량이 집약된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조선 묵죽화풍의 정립 과정을 보여주다

《삼청첩》은 이후 선조의 부마인 홍주원(洪柱元, 1606~1672)에게 넘어갔고, 병자호란(1636) 때 소실될 위기를 겪는다. 이때 한호의 글씨로 쓴 표지와 최립의 서문, 이정의 자작시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그림들은 천우신조로 화마를 피했다. 지금도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이후 풍산 홍씨 집안에서 7대를 이어가며 가보로 전해졌지만, 조선 말기 외세 침탈의 와중에 임오군란(1882)을 틈타 인천에 상륙한 일본 순양함, 닛신(日進)함의 함장 쓰보이 고조(坪井航三, 1843~1898) 손에 넘어가는 비운을 맞는다. 다행히 일제강점기 혼신의 힘을 다해 민족 문화재를 수호했던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이 이를 되찾아 왔고, 현재 간송미술관에 비장(祕藏)되어 전해 오고 있다.


이정은 소재의 특징을 명료하게 부각하는 화면 구성, 극명한 대비를 중시하는 조형 감각, 서예성과 회화성의 조화, 절제되고 응축된 기세의 표현 등을 통해 고유의 미감이 발현된 조선 묵죽화의 전범(典範)을 보여준 화가로 평가받는다. 《삼청첩》은 이정의 현전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조선 묵죽화풍이 정립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미술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이와 더불어 제작 상황이 극적이며 전래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은 작품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 침탈로 이어지는 조선의 국난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미술작품에는 필연적으로 그 작품이 제작되고 향유되던 시대의 지향과 역량이 담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흔히 예술은 ‘시대의 거울’ 혹은 ‘시대의 창’이라고도 하는데, 《삼청첩》만큼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삼청첩》이 그림 자체의 시각적 감흥을 넘어서는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하다.




글. 백인산(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