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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통의 멋과 향기 - 문화재 전문가에게 배운다
작성일
2005-12-2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678


발굴 백 년 의 역사
걸어온 길 그리고 가야할 길

[CENTER]우리 땅에서 발굴이 있은 지 올해로 백년. 그러나 실질적으로 본격적 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이후부터이다. 매장문화재가 법으로 보호받고 전문 인력의 배출과 전문조사 기관의 설립, 그리고 발굴문화재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활발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발굴 백년을 맞이하여 그간의 발자취와 문제점, 그리고 최소한의 발굴과 최대한의 보존을 위해 풀어야 할 과제에 대해 짚어보았다.[/CENTER]




   「올해는 우리나라에서 첫 발굴이 있은지 백 년이 되는 해이다. 1906년 9월 신라사를 연구하던 일본사람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경주 황남리의 옛 무덤 하나를 조사한 것이 그 시초로 이 조사를 통해 겉으로 보기에는 흙무덤인데 안에는 돌무지가 쌓여있고 돌방시설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무덤 중심부까지는 들어가지는 못하여 시굴조사에 그치고 말았지만 신라 무덤의 내부구조를 처음 확인한 것이니 고고학적 작업이 틀림없고 또 일본인에 의한 발굴이라 내키지는 않지만 이를 이 땅에서 이루어진 첫 발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1946년 경주 호우총 발굴을 시작으로 잡고 있지만 그것도 엄격히 말해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두고 한 발굴로써 우리 손으로 직접 한 첫 발굴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일제시기에 우리 국토는 일본 사람들의 고고학 실습장 구실을 한데 지나지 않았다. 고고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사람들이 들어와 유적조사를 빌미로 우리 땅 곳곳을 파헤치고 다녔다. 그들의 식민 통치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김해지역의 임나조사, 평안도와 황해도의 낙랑 대방유적 등을 표적조사를 했으며 또 부여 공주 지역의 왕릉과 개성 강화의 고려 무덤 조사를 핑계로 유물사냥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겉으로 드러난 유적들은 거의 다 파헤쳐 흩어지고 훼손되어 광복이 되고 난 뒤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발굴조사에 관한 인프라가 전혀 없는 상태였고 또 남과 북의 이념의 소용돌이에서 유적에 대한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이어받아 국립박물관이 문을 열면서 발굴조사가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우리 남한에서는 1960년대까지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한에서는 1950년대부터 유적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일제 학문의 잔재를 씻으려는 노력이 남쪽보다 더 강했던 분위기에서 고고학 분야도 활발한 연구와 토론이 진행되었으며 더 나아가 소련과 중국 땅에 있는 우리 고대문화 유적을 공동 조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매장문화재가 법으로 보호를 받게 된 것은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뒤의 일이다. 매장문화재 발견신고제도와 발굴허가제도가 도입되고 국가에 의한 보호를 받게 되었다.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대학의 관련학과가 개설된 것도 그 무렵이다. 1961년에 국립대학에 고고학과가 개설되고 이어서 지방 대학들에도 관련학과들이 생기면서 전문 인력들이 배출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는 대학 박물관이 고고학 조사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국립박물관, 문화재연구소와 함께 발굴조사의 중추기관으로써 훌륭한 업적들을 많이 남겼다. 우리역사를 구석기시대로까지 끌어 올린 석장리유적, 청동기문화 연구에 한 단계 진전을 이룩한 송국리 유적과 흔암리 유적, 그리고 삼한시대를 새롭게 조명하게 된 조양동,

다호리, 중도 유적 들은 모두 6-70년대 이루어진 발굴 성과들이다. 경주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은 경주지구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관광자원화를 위한 최초의 목적발굴이라는 점에서 기록될만하다.

   대규모 토목사업이 벌어지는 곳에서 구제발굴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1971년 팔당 소양댐 수몰지역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개발시대의 상징물인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유적 발굴이 이루어진건 경주 방내리고분군 한 곳 뿐이었다. 지난 몇 해 동안 경부고속도로를 확장하면서 구간별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많은 곳은 평균 1km 구간에 한 곳씩 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으니 그 많은 유적들이 사라진 것은 지금으로써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시대에 고고학의 인적, 물적 여건이 개발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해도 매우 안타까운 일이 분명하다. 1980년대 이후 구제발굴 수요의 증가, 1990년대 이후 발굴의 대규모화가 진행되면서 이제는 연간 1,000억 원이 넘는 시장규모와 발굴전문기관이 30여 곳에 이르면서 고고학 전문직업인들이 수백 명을 넘어섰고 발굴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상당수에 이르게 되었다. 지난 10년 사이에 고고학이 학문의 대상에서 직업의 대상으로 빠르게 전환되면서 문제점들도 적잖이 드러나 발굴기관들은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안으로는 전문성 확보와 조사 수준, 출토유물의 관리 문제들을 비롯하여 비정규직의 반란을 들 수 있고 밖으로는 기관 운영의 투명성에 대한 비판, 개발과의 충돌로 빚어지는 심각한 문제들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양적 팽창에 질적 성장이 따라가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언제부턴가 발굴은 남는 장사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너도나도 관심을 보이게 되면서 공익성을 훼손하고 있기도 하다. 발굴의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익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겠다.

   앞으로 현재와 같은 수준의 발굴 수요는 적어도 10년 이상 계속될 것이라 예상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출토유물의 보관과 보존 문제일 것이다. 해마다 땅 속에 묻혀 있던 수만 점의 소중한 유물들이 빛을 보고 있는데 이를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것은 문제이다. 그리고 이들을 치료할 종합병원을 세우게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지만 이를 치료할 좋은 의사들을 길러내는 학교는 아직도 부족하다. 따라서 가장 좋은 것은 땅속에 묻혀있는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다. 지속 가능한 개발은 우리가 쓸 만큼만 사용하고 후대를 위하여 되도록 남겨두는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고고학의 지속성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발굴과 최대한의 보존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장호수 / 문화재청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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