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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제강점기 선승 만공월면과 의친왕 이강의 인연
작성일
2023-04-2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05

일제강점기 선승 만공월면과 의친왕 이강의 인연 수덕사 근역성보관에는 고려 공민왕의 유품으로 전해 오는 거문고(충청남도 문화재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이 거문고는 만공이 이왕직으로 넘어간 덕숭산 임야의 소유권을 반환받기 위해 운현궁으로 의친왕을 찾아갔을 때 감화된 의친왕이 만공에게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공과 의친왕과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 정보는 많지 않지만, 불사(佛事)에 참여한 기록을 통해 둘의 인연을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00.만공의 40세 때 모습 ©滿空門待會 編, 『(滿空法語) 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냐』, 도서출판 妙光, 1983 01.상해 망명 당시 의친왕 이강 ©대한황실문화원

만공의 사자후(獅子吼), 조선총독부의 불교 정책을 비판하다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은 덕숭산을 중심으로 선법(禪法)을 펼치며 많은 후학을 배출하여 덕숭 문중의 법맥을 형성하고, 한국 불교의 선원(禪院) 체계를 확립한 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공은 덕숭산에 입산한 1905년부터 입적하는 1946년까지 40여 년동안 선법을 펼쳐 전국에서 모인 납자(衲子)들을 지도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주최로 조선 불교 31본산 주지 회의가 열렸을 때, 만공은 조일불교의 내선일체론을 주장하는 미나미 지로(南次郞)를 향해 “전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처럼 파계토록 했으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불교 진흥책은 정부에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라며 일갈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미나미 지로는 총독 재임기간(1936~1942) 중 한국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 강제, 지원병 강화 등 황국신민화 획책을 가장 혹독하게 한 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02.만공이 의친왕으로부터 받은 거문고로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조묵(李祖默)이 새긴 공민왕금(恭愍王琴)이라는 글씨와 함께 만공의 시가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

왕실 인물 중 유일하게 항일운동을 한 의친왕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은 고종(高宗, 1852~1919)과 귀인 장씨(貴人 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2년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으며 대한제국이 세워지면서 의친왕으로 책봉되 었다. 의친왕은 왕실 인물로는 드물게 항일의 길을 걸었던 인물로,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던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의 주선으로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감행했다.


상해임시정부 특파원인 이종욱은 의친왕의 서울 탈출을 계획하여 추진하였다. 1919년 11월 10일, 의친왕을 비롯한 5명이 수색역을 출발해 만주 안동행 열차에 탑승하였다. 그러나 도착 직전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서울로 강제 압송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동단 조직은 해체되었고, 이후 의친왕은 일제에 의해 성북동 별장(성락원)에서 유폐생활을 하게 되었다.


03.보덕사 석가모니후불탱, 1919년 10월 23일, 165×239, 큰방 ©성보문화재연구원, 『韓國의 佛畫-修德寺 本末寺篇』27, 2002 04.수덕사 조인정사 아미타후불탱, 1933년, 175×232.5, 근역성보관 소장 ©성보문화재연구원,『韓國의 佛畫-修德寺 本末寺篇』27, 2002, p.69

보덕사에서 시작된 인연

만공과 의친왕과의 인연은 예산 보덕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南延君, 1788~1836)의 묘를 풍수에 따라 1846년 가야사터로 이장하고 묘 인근에 능침사찰(陵寢寺刹) 보덕사를 창건했다. 만공은 보덕사 주지였던 1919년에 석가모니후불탱을 제작하는데 이 불사에 왕실 인물들이 대거 후원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석가모니후불탱 하단에 마련된 화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친왕전하(義親王殿下) 정축생(丁丑生) 이천광(李天光)과 의친왕비전하(義親王妣殿下) 경진생(庚辰生) 김씨천진불(金氏天眞佛)’, 의친왕의 2남 ‘성길(成吉)’이 시주자로 참여하고 그 외에 여러 상궁과 후궁들도 동참하였다. 의친왕은 ‘이강’이라는 이름 대신 ‘이천광’이라는 이명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공은 의친왕을 비롯한 이왕가 일족과 교류했으며 그 만남은 남연군의 능침사찰인 보덕사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05.보덕사 석가모니후불탱 화기 부분  ©성보문화재연구원 06.수덕사 조인정사 아미타후불탱 화기 부분 ©수덕사 근역성보관 07.수덕사 조인정사 중건 상량문 부분, 1932년 ©수덕사 근역성보관

불사 후원, 독립자금 전달 수단이었나

1932년 만공은 수덕사 주지로 취임한 지 1년 만에 조인정사를 중건하는 대규모 불사를 단행한다. 이 불사에는 의친왕과 사동궁(寺洞宮) 일가도 참여하게 된다. 조인정사 중건 상량문 단월질(檀越秩)을 보면, 보덕사 석가모니후불탱과 달리 의친왕의 작위가 생략된 채 ‘청신사 정축생 이천광(淸信士 丁丑生 李天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상해로 망명하려다 실패한 대동단 사건으로 공족 작위를 박탈당한 후 변화된 신분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청신녀 갑신생 김은현성(淸信女 甲申生 金隱現性)’은 의친왕의 후실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仁, 1884~미상)으로서 의친왕이 상해로 망명할 때 지근거리에서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다.


수인당의 아들(成吉, 秀吉, 命吉) 중 장남 성길[흥영군 이우(興永君 李鍝, 1912~1945)]은 히로시마로 강제 전출 당한 후, 1945년 8월 6일 원자 폭탄 투하로 사망하게 된다. 조인정사 중건 이후에도 의친왕과 수인당 김흥인, 성길·수길·명길 3남은 아미타후불탱(1933) 등 계속해서 만공의 불사에 참여한다.


대동단 사건 이후 의친왕이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수행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그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만공이 만해를 통해 독립자금을 후원했다는 사실과 수덕사가 비밀기지로 사용되었다는 이왕가 후손의 증언을 고려해 볼 때, 불사에 후원하는 것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대체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만공과 의친왕은 서로 다른 출신과 배경을 가졌지만, 독립이라는 공통된 목표 아래 각자의 방식으로 항일의 길을 걸었던 시대의 동지이자 도반이었다.




글, 사진. 이주민(인천공항T2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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