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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민과 함께 하는 문화유산 e-야기
작성일
2006-04-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004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위치한 소령원은 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묘소로 사적 제3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가리키며, ‘원’은 세자와 후궁의 무덤을, 그리고 ‘묘’는 대군과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의 무덤을 봉할 때 쓰는 명칭입니다. 숙빈 최씨는 일개 무수리에서 후궁자리에까지 올라 영조를 낳지만 영조가 즉위하기 5년 전 별세하여 왕실의 법도에 따라 왕비의 무덤인 ‘능’에 모셔지지 못하고 ‘묘’에 모셔지게 됩니다. 영조는 즉위 후 숙빈 최씨의 미천한 출신배경을 콤플렉스로 여겨 ‘소령묘’를 왕비릉으로 격상시키고자 애를 쓰지만 조정 신료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영조 29년에 숙빈 최씨의 묘소는 ‘소령원’으로 봉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숙빈 최씨의 묘에는 비석이 세 개가 있습니다. 숙종 44년(1718년) 후궁 숙빈 최씨가 사망 시 「有明朝鮮國後宮淑/嬪首陽崔氏之墓」라고 두 줄 세로로 써서 세운 비석은 영조가 즉위하지 못했을 당시에 세워진 것입니다. 영조가 왕위에 있으면서 친필의 비석 두 개를 세우는데, 정자각 우측 위쪽에 각각의 비각 속에 들어 있습니다. 왕이 되자마자 세운 것에는 「淑嬪海州崔氏昭寧墓」라 쓰여 있는데, 영조는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왕비가 아니라서 종묘 신위에 올라가지 못하자 즉위하던 해인 1725년 생모를 기리기 위해 궁정동에 사당을 만들어 ‘숙빈묘’라 하게 됩니다. 1744년 이를 육상묘毓祥廟로 개칭한 후, 육상궁으로 승격시키면서 소령묘도 소령원으로 승격됩니다. 이 육상궁에 1908년 7월 23일, 왕과 추존왕推尊王의 생모 5명의 신위들을 모아 봉안하면서 육궁이 됐으나, 1929년 영친왕의 어머니인 순빈 엄씨의 신위를 봉안해 현재 칠궁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영조가 왕이 되고 29년이 지난 1753년에 비석을 하나 만들어 「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와 같은 내용이 적힌 또 다른 비각을 세웁니다. 영조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곳에 시묘막을 짓고 3년 상을 치릅니다. 하지만 영조가 실제 시묘살이를 한 날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사람을 시켜 대신 하도록 했을 터이죠. 시묘막은 99칸짜리 집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다 타버리고 현재는 깨어진 기왓장과 함께 주춧돌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다음은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 묻어나는 소령원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영조는 어려서부터 무예와 산타기를 좋아하여 틈만 나면 사냥을 하고 이산 저산을 두루 다녔습니다. 풍수지리에도 밝아 산세를 살피면서 다니던 중 지금의 광탄면 용미리 산을 지나가다 초라한 장례로써 산소자리를 파는 것을 발견하여 올라가보니 험준한 망지에다 자리를 잡아 수인이 역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도 딱한지라 상주에게 사연을 물은 즉, 원래 가난한 집에 태어나 좋은 자리에 산소를 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 자리를 봐준 사람은 누구냐고 물은 즉, 아래 산기슭에 사는 선비가 묘소를 정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상주를 위해서 영조는 양주목사에게 쌀 1가마니와 돈 100냥을 보내라는 편지를 써 보내니 양주목사가 이를 보고 즉시 포졸을 시켜 돈을 보내어 이 뒤편에 묘소를 다시 잡아주고 장사를 잘 치르게 하였습니다. 장사를 치른 후 영조가 산을 내려와 선비를 찾아가서 왜 이런 나쁜 곳에 산소자리를 잡아 주었냐고 묻자 이 선비는 쌀 1가마니와 돈 100냥이 생길 자리인데 왜 그러냐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영조는 깜짝 놀라며 자기가 한 일이 꼭 맞아 감탄하며 치하하고 돌아가면서 명지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얼마 후 사친인 숙빈 최씨가 서거하자 각지에서 명지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였으나, 영조는 이들을 전부 물리치고 아무개에 사는 이 선비를 데리고 오라고 하여 묘지를 잡은 곳이 바로 광탄면 영장리 산1번지 소령원인 것입니다. 소령원은 중국의 풍수지리지에 수록될 정도로 길지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영조가 소령원을 지정해 준 명지사 이 선비를 후사하기 위해 궁궐에 초대하여 그 능력을 시험하기로 했습니다. 영조는 경기도 일대에 명당자리에 대하여 물어보자 이 선비는 막힘 없이 이야기하였습니다. 영조는 그가 명지사임이 틀림없고 학문에도 뛰어난 인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시험에서 영조는 용상 밑에 쥐 1마리를 숨겨 이 선비에게 용상 밑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물어보자 이 선비는 곰곰이 생각한 뒤 쥐 3마리가 들어있다고 말하자 영조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믿고 선비를 참하라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 두 마리가 들어 있었고, 영조는 후회했지만 이미 명령을 수행한 뒤였습니다. 영조는 사친의 묘가 능陵으로 모시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승격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조정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반대가 심한 중신 박사정朴師正을 소령원 제사 지낼 적에 보내 봉노를 시켜 숯불이 이글대는 향로를 맨손으로 들게 하니 열손가락 사이로 기름이 흘러 내리는 찰나 영조가 이래도 능으로 책봉하지 않겠느냐고 하문하니 “소신은 죽사와도 능지하원지상陵之下園之上입니다.”라고 해서 능으로 격상하는 것을 단념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나무꾼이 도성에 들어와 모화관 부근에서 나무를 팔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영조가 이 나무꾼을 보고 어디서 해온 나무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평시에 말하던 대로 자랑스럽게 양주(당시에는 양주군에 속했음) 소령릉이 있는 마을에서 해왔다고 대답하자 영조는 이 나무꾼을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나서 대신들 앞에서 다시 물으니 역시 같은 대답이었습니다. 이때 영조는 대신들에게 백성들은 소령릉이라고 하는데, 조정 대신들은 왜 소령원이라 부르냐고 호통을 친 일도 있습니다. 후에는 대신들이 능으로의 승격을 주장했다지만 영조는 궁중의 법도에 맞춰 그대로 원으로 했다고 전합니다. 이후 영조는 나무꾼에게 통훈대부에 작위를 내리고 대대로 능세원(능에서 나무를 간수하는 직책)을 지내게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영장리에 김해 김씨가 몇 집 살고 있는데, 김호길金好吉의 8대손이라고 하며, 당시 능참봉陵參奉, 능순원陵巡員, 능수복陵守僕이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조의 모친에 대한 애틋한 효심이 이런 이야기를 낳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은 상주하는 관리인이 없는 왕릉도 있는데, 소령원은 원園인데도 유일하게 참봉이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소령원에서 앞을 보면 안산인 고령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고령산 아래 있는 보광사는 영조가 숙빈 최씨의 제사를 봉향하는 원찰로 지정하고 어필을 내린 사찰입니다. 보광사와 소령원 곳곳에 영조의 사모곡처럼 남아 있는 것은 궁녀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하녀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의 눈물을 아들이 알고 헤아린 증거 아닐까요?

정종익 / 문화재청 행정주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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