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화폐로 사고 판 비운의 문화재 비하인드 스토리 - 테마기획
작성일
2007-04-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704

제자리를 잃은 민족 문화재 되찾아야 할 우리의 넋

 hspace=6 src=74434. 모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저 숫자는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의 수로,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 저 정도라고 한다. 도대체 언제 그리고 누가? 라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대략적인 시기와 주체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쟁 없이 이백 년을 이어오던 조선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임진왜란기와 외침과 내란으로 조선이 다시 내리막길을 걷던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 두 시기의 공통분모인 일본에 화살이 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약탈, 침탈, 강탈 혹은 호사가들의 수집 등의 방법으로 여기저기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들, 그 비운의 스토리를 더듬어 보자. ‘문화는 국력’을 굳이 운운하지 않더라도 도굴당하던 조상의 무덤조차 지킬 수 없던 그 시절의 무력함은 74434라는 숫자로 대변된다.  


일본 국보로 둔갑한 오구라컬렉션

작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오구라컬렉션’ 한국 문화재를 조사하여 도록으로 발간하였다. 오구라컬렉션이란, 일제강점기에 남선합동전기회사의 사장을 역임한 오구라 타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96~1964)가 1922년부터 1952년 기간 중 국내에서 반출해 간 유물 1,100여 점을 가리키는 말로, 대부분이 한국 유물이고 중국, 일본 유물이 소량 포함되어 있다. 1,000여 점에 달하는 한국 유물은 다양한 분야와 전 시기의 유물을 총 망라하고 있다. 이들 중 8점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31점이 중요미술품으로 인정되는 등 모두 39점의 유물이 일본의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니 그 컬렉션의 규모와 가치를 짐작할 만 하다.

오구라는 어떻게 저렇게 많은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을까? 쉽게 말해보자면 오구라는 돈 많은 일본의 호사가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남선전기 사장을 지내면서(남선이란, 우리나라의 영남지역을 가리킨다), 대구에 거점을 두고 불법적인 도굴을 뒤에서 조종하거나 지원하는 등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에는 오구라와 같은 작자들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일례로, 지금도 땅만 파면 유물이 나와 철도며, 아파트 신축 같은 건설 사업을 벌이기가 용이치 않다는 경주는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인들에게 소문난 ‘금광’이었다.
일제 초기의 한 조사 기록에 따르면 경주 근방에만 수 만 기의 신라 고분이 산재하였다고 했는데, 총독부가 1915년께부터 학술적 발굴이라는 합법적인 이름으로 이들에 대한 발굴을 시작하자 경주 일대의 고분들에 각종 유물들과 순금 장신구들이 산재해 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학술 정보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본의 악질 도굴꾼들에게 유용한 밑거름이 되었는데, 특히 1921년과 24년의 금관총, 금령총의 발굴은 그들의 재물욕에 불을 지르는 일대 사건이 되었다. 무너진 고분 속에서 금관총의 이름을 결정짓게 한 황금보관(국보 제87호)과 순금 과대 및 요패(국보 제88호), 금귀걸이, 금반지, 금팔찌 등이, 또 금령총에서도 황금보관(보물 제388호)과 귀고리, 요패, 도제기마인물상(국보 제91호) 등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후 불법적인 도굴로 발굴된 경주 일대의 유물들은 모조리 일본 골동상들의 수중에 들어갔고, 이러한 도굴을 뒤에서 조종하고 지원한 여러 일본인들의 대표급 인물이 오구라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제의 도굴 결과, 현재 경주를 비롯한 전국 고분들 중에서는 상태가 멀쩡한 것이 거의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혼자 모은 문화재가 천 점이 넘고 그 중 39점이 일본의 국가지정 문화재가 되었을까. 이렇듯 마구잡이로 자행된 일본의 조선 문화재 약탈은 오늘날 문화재의 고증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
 hspace=6 src=


밀매되었던 반가사유상


골동품 밀매매를 통해 큰 돈을 벌고자 했던 일본의 악질적 골동상들은 고분이나 유적, 절터, 사찰 할 것 없이 약탈을 자행했는데,  총독부의 암묵적인 비호 아래 어떠한 추궁이나 조사 없이 문화재를 약탈하고 그 증거를 인멸하였다. 대표적인 실례가 삼국시대 불상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국보 78호, 국보 83호인 금동반가사유상,금동미륵보살반가상 두 기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두 기의 불상은 한일합방을 전후해 지방 어딘가에서 서울로 불법 반출되었는데, 반출한 자들이 그 출처를 전혀 말하려 하지 않았고 증거를 인멸해 버려 아직도 그 원래 출토 지역을 확실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두 기 중 하나는 서울에서 1912년 이왕가박물관이 가지야마라는 일본인으로부터 2,600원이라는 거액을 주고 사들였는데, 가지야마 역시 오구라와 같은 치였다. 1910년대 조선의 쌀 한 가마 가격이 4원 정도였다니, 지금 쌀 한 가마가 20만 원 정도 한다고 했을 때 현 시세로 계산해 보면, 당시의 2,600원은 현재의 1억 3천만 원 정도이다. 그러나 1910년대 쌀의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귀하고 높았음을 생각한다면 2,600원은 상당히 거액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가지야마는 불상을 팔면서 그 출처를 얼버무리고, 오히려 경주의 폐사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한참 동안 그 출처가 경주라고 믿어졌었다. 허나 후에 충청도 어느 절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기록도 밝혀져 의견이 분분한 상태인데, 현재는 오히려 충청도에서 출토된 백제계 불상이라는 설이 더 우세한 실정이다. 어디선가 서울로 불법 반출된 다른 한 기의 반가사유상 역시 1912년에 거액의 판로를 찾다가 관헌의 눈에 띄어 데라우치 총독 관저에 기증 형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개인 소유가 되어 버린 이 불상은 1916년 데라우치가 일본에 돌아갈 때 총독부박물관에 다시 기증하여 겨우 국내에 남게 되었는데,  이 역시 그 출처가 경상도일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그 출토지를 전혀 알 길이 없다.

 hspace=6 src=


협박으로 팔려 가 돌고 돈 보리사터 현기부도탑

 hspace=6 src=
양평의 보리사터 현기부도탑은 다나카와 다카하시라는 일본 골동상이 당시 일제의 강세를 등에 업고 보리사 주지와 마을사람들을 협박하여 단돈 120원에 매입한 문화재이다.
그들은 현장에서 부도를 사 놓고는 서울에 와서 다시 다른 일본인에게 500원에 팔아 넘겨 단박에 380원을 벌었는데, 일제 치하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 부도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사고 팔기를 거듭하여 행방불명되었다. 이후 45년이 지난 1956년, 이화여대가 어느 일본인 집이었다는 곳의 정원 수목과 부재들을 일괄 매입할 때, 정원 장식물로 서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현재 이화여대에서 보관 중이다. 보물 제351호로 지정된 이 부도는 이후 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양평 보리사터 현기부도탑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행방불명되었던 사이의 기록 부재로 보리사터에서 팔려 나간 부도라는 확증이 없기 때문에 보물 지정 명칭이 ‘석조부도’라고만 되어 있어 일제치하 가장 전형적인 수난과 비운의 문화재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대는 이미 의식주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문화유산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되는 시기이다. 문화는 국력이라는 말을 굳이 운운하지 않더라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재는 세계 속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겨레의 얼을 빛나게 할 소중한 매개체인 것이다. 나라 힘이 약하면, 그 문화재는 겨우 어느 돈 많은 호사가들의 수집품이요, 장물아비들의 돈벌이 수단 밖에 될 수 없다. 오늘이라도 당장 지역 박물관에 나가 그 문화재들을 살펴보자. 찬란하게 빛나는 역사와 도굴된 치욕의 역사가 공존하는 그곳에서 우리의 반만년사를 되짚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글ㆍ이 인 / 사진ㆍ남정우
사진 제공ㆍ국립문화재연구소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