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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번뇌를 깨치는 종소리
작성일
2017-07-0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351

번뇌를 깨치는 종소리 -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36호 연복사종 연복사종은 형태가 우아하고 조각들이 섬세할 뿐 아니라 소리 또한 아름답고 맑아 그 여운이 100리 밖까지 퍼졌다고 한다. 종의 명문 또한 고려시대 금석문 자료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동과 주석을 합금한 청동(靑銅)으로 주조한 종의 무게는 약 14t에 달하며, 크기는 높이 3.24m, 지름 1.88m, 두께 23㎝이다. 현재 북한의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136호이며, 경기 개성시 북안동 남대문 누 위에 있다.

나라의 복됨을 염원하며 중창한 연복사

연복사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 있던 절 가운데서도 이름난 큰절이었다. 고려 인종 때 고려에 사신으로 온 송나라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정전이 지극하여 왕이 사는 대궐보다도 화려하다”고 하였으며 오층탑은 높이가 2백 척(尺)이 넘었다고 한다. 본디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또는 줄여서 보제사라 했으며 속칭 당사(唐寺 큰 절이라는 뜻)라 불렸다고 한다. 언제부터 연복사라 지칭했는지는 알 수 없고, 『고려사』 충숙왕 원년 조에 연복사란 이름이 비로소 보일 뿐이다.

고려 말년에는 대대적인 중창사업이 계획돼 공민왕이 중창하려 했으나 못했다. 공양왕 2년에는 연복사 승려 법예(法猊)가 낡아 무너지게 된 오층석탑과 삼지구정(三池九井)을 다시 본래 모습으로 하면 국태민안할 것이라며 왕을 설득시켜 근처 민가 30여 호를 헐어 담장을 넓히고 삼지구정을 팠으며 홍복도감(弘福都監)에 베 2천 필을 들여 탑을 수리하게 했다. 그리하려 오층 목탑을 세웠으나 헌신(憲臣)의 비난이 있어 완공하지 못하고, 조선조태조가 등극한 초년(1392) 12월에 비로소 완성했다. 이듬해 봄에는 목탑에 단청을 하고 탑에 불사리와 대장경, 비로자나불화상(畵像)을 안치했으며, 그다음 해에는 나라의 복리를 염원하는 문수회로서 완공식을 거행했다. 당시의 장엄함을 “꿩이 구름 밖을 나는 듯, 새가 저 하늘가에서 날개 치는 것 같으며, 채색이 휘황하여 공중에 번쩍인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 듯이, 임진·병자의 난리를 겪은 뒤 연복사는 주춧돌은 그만두더라도 절터마저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 의하면 연복사는 명종 18년(1563)에 불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살아남은 종은 개성 남대문 옆에 종루가 세워져 그곳에 옮겨 시보용(時報用)으로 쓰이다가, 1914년 시구(市區)가 바뀜에 따라 종루가 철훼(撤毁)되면서 오늘날과 같이 남대문 누 위로 옮겨져 울지 않게 되었다.


고려의 종을 원나라 사람들이? 종 조성에 얽힌 이야기

연복사종은 고려에서 제조됐으나 종을 만든 공장(工匠)은 고려인이 아닌 원나라 사람들이다. 어찌 된 사연일까. 이 종에 새겨진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새로 주조한 연복사종의 명 병서(演福寺新鑄鍾銘幷序)』와 『금강산의 장안사를 중건한 비문(金剛山長安寺重興碑)』이란 글을 통해 그 사연을 알 수 있다.

고려 말 금강산 장안사에 굉변(宏卞)이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신라 법흥왕 이래 이름난 사찰인 장안사가 당시 훼손이 매우 심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돌보지 않음을 한탄하며 스스로 중수하겠다는 서원을 마음속에 세웠다. 그러나 힘이 모자라 중도에 부득이 중지하게 되자, 단월(檀越: 사찰이나 승려에게 물건을 베푸는 불교 신자)을 구하러 원나라 수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당시 고려 출신의 기씨(奇氏)가 원 순제 즉위 7년(1341)에 원비(元妃)가 되어 황태자를 낳았는데, 기황후는 이것이 부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래서 부처께 은혜를 갚고, 황제와 황태자의 수복을 기원하는 불사공양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장안사의 굉변이 단월을 구함을 듣고, 금강산은 본래 고국의 명산이며 장안사는 불덕이 뛰어난 곳이라 이곳에 선승업(善勝業)을 일으킴이 좋으리라 여겼다. 원 순제 지정 3년(1343) 자정원사를 비롯한 공장을 파견하고 많은 보시를 베풀어 중수사업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지정 6년에는 종까지도 조성했다. 한편 이 일에 대해 당시 고려 조정에서도 군신 간에 논의가 있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의 영역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성천자(聖天子)께서 근신을 보내어 불사를 크게 일으키시어 후세에 무궁한 은혜를 드리운 것이 이와 같은데, 우리는 털끝만큼도 도운 것이 없다. 어찌 보답할 도리를 강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니, 제신(諸臣)이 아뢰기를 “연복사에 큰 종이 있습니다만, 오래도록 폐기되어 쓰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훌륭한 기술자가 온 기회에 다시 새롭게 종을 만든다면, 황상의 뜻을 체득하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불후의 공을 이루는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자정원사인 강금강(姜金剛)에게 이 일을 전하니, 강공이 흔쾌히 승낙하고는 갈 길을 멈추고서 종을 만들어 주었다. 종이 완성된 것은 고려 29대 충목왕 2년 1346년 6월이었다.


고려 종의 형식을 탈피한, 연복사종의 아름다움

연복사종은 고려에 온 원나라 기술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고려 종과는 형식이 다르다. 종의 몸체는 기다란 원통형이며, 입구는 나팔모양으로 벌어졌고 직선이 아니라 8개의 너울모양의 굴곡으로 이뤄졌다. 그 안쪽 둘레에는 물결무늬가 있으며 그사이에 8괘를 새긴 진귀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종을 거는 고리인 용뉴(龍鈕)의 경우, 몸은 하나이나 양 끝에 각각 머리가 달려있어 마치 쌍룡과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한마리 용의 고려 용뉴와는 다른 점이다. 마지막으로 종을 울리기 위해 당목(撞木)으로 치는 부분 곧 당좌(撞座)도 없고, 유곽(乳廓: 종의 윗부분 네 곳에 새겨진 네모난 테. 유곽 안에 볼록 솟아 있는 9개의 꼭지는 유두라 함)도 없다.

종의 전체는 솟아오른 굵은 가로줄이 세 줄로 위아래를 둘로 나눠져 있다. 종의 중앙 상부에는 사방으로 삼존불을 부조하고 그 중간 네 곳에 직사각형으로 가로·세로의 곽 안에 ‘法輪常轉(법륜상전)’, ‘國王千秋(국왕천추)’, ‘佛日增輝(불일증휘)’, ‘皇帝萬歲(황제만세)’라는 4구를 새겼는데, 이 글씨는 저수량(褚遂良)의 서체이다. 그리고 아래 부분 즉 요대(腰帶) 사이에는 범자와 몽고문자를 새겼고 그 아래 곽 내에 종명을 주조하여 새겼다. 명문은 당대의 명신 이곡이 지었으며, 글씨는 성사달(成師達)이 썼는데, 글자 크기는 2㎝ 정도이다. 명문 말미의 병술(丙戌)이라는 간지(干支)는 고려 충목왕 2년(1346)으로 종의 주조연대를 밝혀주고 있다.

 

글‧이기선(한국불교조형연구소장)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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