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트위터 페이스북
제목
남한산성 출토 통일신라 초대형 기와의 비밀
작성일
2013-01-1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658



‘하늘이 만든성 天作之城’ 남한 산성의 행궁 발굴과 복원

조선 인조 4년1626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따라 수축된 남한산성은 북 한산성과 함께 도성방어를 담당하였던 대표적인 산성이다. 남한산성 의 둘레는 8km의 원성과 4km에 달하는 옹성과 외성을 포함하면 전 체 12km에 달하며,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산꼭대기에 구축되었 지만 성 내에 물이 풍부하고 수십만 명이 들어가기에도 넉넉한 평지 를 갖추고 있다.

이처럼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에 구축되어 한 번도 함 락된 적이 없는 남한산성을 사람들은‘하늘이 만든 성(天作之城)’이라고 하였다.

남한산성에는 유사시 임금의 거처를 위하여 만든 건물인 행궁行宮이 있었다.‘ 남한행궁南漢行宮’이라 불렀던 이 행궁은 인조 임금이 청나라 군대에 항전하면서 47일 동안이나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후기까지 잘 관리되어온 남한행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행궁 건물이 철거된 후 폐허로 남아 있었다. 이후 남한산성 정비복원계획 이 수립되면서 1999년부터 2008년까지 토지주택박물관에 의하여 8 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 으로 행궁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남한행궁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하궐지 앞마당에서 발굴된 통일신라 시대 대형 건물지

발굴조사는 상궐부터 연차적으로 실시되었으며, 발굴이 끝나면 곧바 로 복원공사가 진행되는 등 별다른 문제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궐 조사를 마치고 하궐 앞마당에 대한 조사를 하는 것으로 행궁권 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러던 2004년 4월의 어느 날, 하궐지 앞마당의 토층조사를 위하여 시굴구덩이를 설치하고 땅을 파내려가고 있던 조사단은 1m 깊이에 서 통일신라시대 기와무더기를 발견하였다. 기록으로만 남아있었던 신라 문무왕대의‘주장성晝長城’관련 유구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 는 순간이었다.

예기치 않게 발견된 새로운 건물지에 대한 전면 조사를 위해서는 행 궁복원사업이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3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 하여 전모가 드러난 건물지는 길이 53.5m, 너비 18m에 달하는 규모 로서 경주 남산성 장창지와 함께 산성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의건 물지중 최대 규모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건물은 뒤쪽에 배수로를 설치하고 사방으로 회랑칸을 두었으며 기단 과 초석을 설치하여 비를 피하면서 건물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든 구조 였다. 건물지 주변에 많은 양의 기와들이 켜켜이 쌓여 있고 숯과 불에 탄 흙이 덮여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재로 건물이 무너지면서 그대로 땅 속에 묻힌 것으로 보였다.

기와 한장의 무게가 20kg에 달하는 초대형 기와

놀라운 것은 기와의 크기였다. 길이 50cm 내외의 기와가 주를 이루 지만 그중에는 길이가 64cm, 무게가 20kg에 달하는 초대형 기와들 이 다수 있었다. 일반적인 조선시대 기와에 비하여 5배 정도 무거운 대형기와는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 울 정도의 크기였다.

이처럼 큰 기와를 만들려면 높이 1m가 넘는 대형 와통을 사용해야 하 고 기와 성형을 위하여 와통을 한 번 감는 데 필요한 점토의 무게만도 120kg이 넘어서 와공 3~4명이 달려들어 힘겹게 작업을 해야 가능했 을 것이다. 기와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이렇게 무거운 기와가 사용 된 건물은 지붕 무게를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발굴현장을 다녀간 고건축학자들은 현대의 기술로도 이렇게 무거운 기와를 지탱하는 한 옥 건물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지붕에 사용된 기와가 아닐 것이 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건물지 기초를 조사해보니 이 건물지는 무거운 하중을 견딜 수 있도 록 주춧돌 아래의 생땅을 암반이 드러날 때까지 파고 점토와 할석割石 을 교대로 다짐을 하여 지반이 침하되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견고한 대지를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이하게도 건물지의 벽체도 판축공 법으로 조성하였는데 벽체 하단부에는 숯을 깔고 점질토와 사질토를 교대로 다져서 벽체를 만들고 벽체의 안과 밖에는 기와나 할석을 쌓 아서 마감하였다. 이렇게 조성한 벽체의 두께는 무려 2m가 넘었다. 이는 무거운 지붕의 중량이 벽체로 분산되도록 한 특수한 형태의 건 축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왜 이처럼 두꺼운 벽체에 초대형기와를 사용한 대형건물을 만든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주장성 축성 목적 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무왕 12년672 대당전쟁을 위하여 쌓은 주장성 晝長城

668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나자 대동 강 이남지역을 신라에 주기로 한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역 을 당나라의 영토에 포함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당나라의 배신에 직면한 신라는 과감하게 대제국 당나라와 전쟁을 결정하고 대당전쟁 에서의 승리를 위한 대비책을 수립하였다.

당나라 정계에 진출한 신라인이나 유학승려 등을 통하여 입수한 정보 를 바탕으로 당시 서역지방에 반란이 일어나서 당나라가 신라와의전 투에 총력을 기울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기병을 중심으 로 하는 당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길이 5m에 달하는 긴 창을 소지한 장창부대를 새롭게 편성하는 한편 무기개량에도 박차를 가하여 1천 보(약 1.8km)이나 날아가는 쇠뇌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또한 병력면에서 절대 열세였던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을 위하여택 한 전술은‘청야입보淸野入保’술이었다. 이는 적이 쉽게 공격할수없는 험준한 산에 성을 쌓은 후 평지의 식량을 모두 산성으로 옮겨 놓고 피 하였다가 적이 지치게 되면 공격하고, 적이 우회하여 지나가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전통적인 대중국 방어전략이었다.

이를 위하여 문무왕 12년672 한산주에 둘레 4,360보에 달하는 주장성 을 쌓았다. 4,360보는 지금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대략 8km에 달 하는데 당시 신라가 쌓은 성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

아마도 1만여 명 이 넘는 축성인력이 한마음이 되어 목숨을 걸고 성을 쌓았기에 1년이 안되는 짧은 기간에 축성공사를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성내에는 여 러 동의 지휘처소와 병영, 각종 군수물자를 비축하던 창고가 있었을 것이며 하궐지에서 발굴된 대형건물지는 이때 구축된 창고중 하나였 을 것이다.



주장성의 무기고로 추정 되는 대형 건물지

일부 학자들은 건물지가 대규모라는 점을 들어 관청 건물 또는 의례 용 건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2m에 달하는 두꺼운 벽체가 조성되고 건물지 내에서 생활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점, 특대형 기와를 사용하였지만 관청이나 사찰 또는 의례용 건물이라면 사용되 었을 와당이 전혀 사용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라는점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건물지는 창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에서 장기간 농성을 위해서는 각종 군수물자를 비축하는 창고가 필요하다. 금, 은, 포목, 소금, 간장, 각종 곡식 등 생필품 저장 창고, 활과 화살, 창, 검, 도끼 등 각종 무기를 저장하던 무기고, 그 외에도 축성과 보수를 위한 각종 토목 공사용 도구들과 수천 마리의 우마를 먹일 건초 저장고 등 여러 종류의 창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주장성 관 련 창고 중 발굴된 것은 유일하지만 산성내의 가장 중요한 지점에 있 고, 건물의 구조가 특히 견고한 것으로 미루어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 인 무기고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대형 건물 내부 공간의 크기는 두꺼운 벽체를 제외하고도 약 1,400㎥ 여서 아마도 수 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보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건물지 建物地 출토 숯에 대한 연대 측정결과

주장성의 축성시기와 일치 초대형기와가 사용된 통일신라시대 대형건물지가 언제 조성되었는 지 알기 위하여 발굴과정에서 수습한 숯으로 절대연대를 측정해 보았 다. 그 결과 시료의 연대는 대부분 600~900년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건물지에서 출토된 인화문토기편과 목부분에 물결무늬가 있는 대형 항아리, 각병 등의 토기나 기와의 제작 및 사용연대가 7세기 후반에 서 10세기 전반이라는 분석결과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 건 물지는 성벽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신라식 성벽유구와 함께 주장성관 련 유구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남한행궁 하궐지 앞마당에서 발견된 초대형기와는《삼국사기》 에한줄의 기록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은 주장성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글·사진.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 관장)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대변인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