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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방탁자, 조선 미의식의 으뜸
작성일
2013-01-1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588



19세기에 창안된 사방탁자

사방탁자는한국가구의전통과고유성이어떠한지를여실히말해준다. 사방탁자만큼 독특하고 널리 알려진 가구가 또 있을까 싶다. 이 가구 는 1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처음 등장했다. 유중림(柳重臨, ?~?)의『증보 산림경제』는 사방탁자가 문방품의 완상玩賞분위기에서 새로이 제작 된 가구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근년에 만들어진 서가는 층널에 서권 화축 화병 취우 호 향로 다완 등 문방기구를 늘어놓는 문방의 총사로서 서실의 치완侈玩이다.’층널 과 뼈대로 구성된 장방형의 명나라 때의 가구‘가격架格과의 관련이 나, 명칭과 기능으로 미루어 여기서의 서가는 사방탁자를 가리키며, 1827년 경의 저술 시점이 문방청완文房淸玩의 애호풍조가 성행하던 시 기와도 일치한다. 그런데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뼈대와 층널만으로 구성된 기물을 서실의 사치스런 애완품이라니, 그 안목과 기준이 참으로 놀랍다. 그 연유를 살펴보자.

문방의 물건을 감식하고 고결한 품격을 논하는 풍조는 숙종연간을전 후하여 성행하기 시작했다. 문방청완으로 불리는 이 취향은 청대 공 안파의 영향을 받아 북학파 학자들과 경화세족들이그유행을 주도했 다. 특히 박지원, 박제가는 중국 연경에 갈때마다 골동상점에 일부러 들러 지식을 쌓고, 문헌을 가져와 소개함으로서 문인들 사이에 큰 반 향을 일으켰다.

18세기에 이미 광통교 일대에 서책과 고동기를 파는 시장이 형성되었고, 19세기에는 문인들뿐 아니라 기술직 중인과 평민 부유층으로 확대되어 폭넓게 향유되면서, 조선후기 이후의 보편적미 의식과 문화적 특질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사랑방의 개념이 생 긴 것도 이 무렵이다.


조선 미 의식의 기준

사방탁자의 조형적 특질의 내력과 연관하여 내친김에 서재 주인들의 사유와 삶의 태도를 좀 더 들춰보자. 문인들 사이에 청제용품을 두고 시와 명銘을 짓거나 품격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표현한 예도 적지 않다.

“책상이나 연상을 만들 때 다리와 상판 사이에 띠장식이나 운각을 붙 이면 잡스러워진다. 금구장식을 붙여도 안 되고, 주칠이나 황칠도 안 된다. 문갑에도 기화를 세기지 말라. 조촐한 것만 못하다.”고 했다. 『산림경제』를 지은 홍만선의 안목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랑방 가 구의 전형을 그대로 묘사한 듯 실감난다.

뿐만 아니라 애정을 쏟은 나 머지 의인화 하여 표현한 명사들의 곡진한 가구 예찬론이 끝없이 이 어진다. 퇴계 선생이 스스로 도끼질 하여 만들어 쓴 거친 소나무 서안 은 선비의 공예인식을 정점에서 보여준다. 이들이 조선가구 특유의 아취와 격조를 앞장서 이끌어간 것이다.



정황이 이러다보니 사랑방 기물에서그주인의 취향과 안목이 고스란 히 배어나게 마련이었다.

여기에 가급적 인공人工의 흔적을 남기지 않 으려는 장인과 주문자의 천공의식天工意識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었다. 지나친 인공의 흔적이나 호사스런 장식을 달가워하지 않는 취향은이 전부터의 오랜 전통이다.

그러고 보면 극도의 절제미를 지닌 사방탁 자의 탄생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사방탁자는 장인의 숙련된 솜씨와 서재 주인인 선비의 예민한 감각이 버무려져 생성된 소산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들의 안목은 가구는 물론, 문방구에서도 고아한 품격을 내포하되 장식을 배제한 교탈천공巧奪天工의 미의식을 지향하여 내실용 가구와 완연히 대비되는 경지를 구축해내기에 이른 것이다.

무기교의 기교라든가 완성에 대한 무관심으로 지칭되는 전통 미의식의 평어들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간결하고 담백한 교탈 천공의 정수

조선가구를 두고‘한 점 속기 없는 경지’로 표현하기도 한다. 단아하 고 절제된 구조체는 과거 어느 시대의 유물과도 비교하기 어렵다. 빈 여백에 생활주체의 여망을 싣는 것이 공예 문양의 일반적 소임이고 보면 달라도 많이 다르다.

가히 일상과 탈속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뛰어난 비례와 조화로운 균제미均齊美를 두 루 갖추었으니 한국미의 정화로 꼽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군더더기를 뺀 기하적인 구조는 무늬결을 남기는 것 이상을 넘지 않는 담백한질감과어우러져생활공간의격조를한껏드높였다. 오동나무를 불에 지져 무늬를 내는 낙동법을 선호한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흑백의 강렬한 무채색 대비로서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하는 먹감나무의 문 판과더불어조형의격조를최고의경지로끌어올리기에충분했다.

세간을 보면 주인의 품격을알수있다는 말은 설득력을 얻는다. 사랑방 가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장식이 많다는 안방가구의 치장도 다른 나라 의 가구에 비하면 최소한의 것일 뿐이다.

이렇게 제작된 가구는 서양 의 화려한 거실이나 다다미방, 어디에 놓아도 당당하게 존재를 드러 낸다. 전혀 다른 문화적 환경에 두더라도 결코 기가 죽는 법이 없지 만, 그렇다 하여 으스대거나 홀로 튀어 조화를 깨는 법이 없다.

복잡한 결구結構기술을 내면으로 승화해내었을 뿐더러, 삶의 중심에 깊숙 이 밀착되어 생활정서를 온몸으로 체득하고그리듬을 실어내었기때 문이다. 쓰임을 중심으로 조형의 에센스를 추구한 결과가 시대를 뛰 어 넘는 고전미의 요체로 꼽힌다.

시간의 경계를 넘은 고전 미

기둥과 쇠목, 천판과 문으로 구성된 기본 골격이 스케일만 작을 뿐 한 옥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안에 놓인 작은 집이 가구요, 그것을 싸고 있는 큰 가구가 집이다. 따라서 수요주체를 축으로 하여 가구와 집은 하나의 조형적 운율 속에서 긴밀한 일체감을 이룰 수 있었다.

조선가구의 구성 원리 가운데 으뜸은 단연 짜임과 이음의 변주다. 수 직과 수평의 구조체가 만들어 내는 긴장감 넘치는 공간과 여백의 균 형이 보는 이의 눈높이와 만나는 형태에 따라 제각기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원리가 나무의 결구에서 비롯한다.

높은 기온차를 극복하기 위해 오랫동안 경험을 갈고 닦아온 결과가 바로 견실 한 짜임과 마감기술이다. 금속 보강재를 적게 쓰는 대신 치밀한 짜임 기법을 개발했고, 못을 거의 쓰지 않지만 쓰더라도 쇠못 대신 대나무 못을 써서 몸체와의 유기적 일체감을 이루는 지혜를 발휘했다.

짜임기술이 비단 한국만의 전통이 아님에도 조선가구의 짜임이 특별 한 것은 공간과 비례의 빼어난 형식미를 곁들인 탓이다. 정치한 결구 기술을 내면화함으로서 오래 써봐야 비로소그가치를 깨닫게 되는것 도장점이다. 장인이 만들고 세월이 완성하는 고전이 바로 조선가구의 진면목이다. 사방탁자가 그 정점에 위치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글. 최공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교수)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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