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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지리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담다
작성일
2014-12-05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7308

지리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담다
지리는 자연·인문·사회에 걸친 다양한 현상의 총체이며, 이와 같은 현상들이 긴밀하게 결함됨으로써 형성된 여러 

지역들이 역사의 흐름을 따라 역동적으로 변천되어 왔다. 이에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역사와 지리의 관계성을 밝혀보

고, 우리의 전통적인 세계관과 공간관을 살펴봄으로써 고유의 지리사상을 설명해본다. 01.『대동여지도(보물 제850

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간격으로 구분해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마다 동서 방향의 지도를 수록했다. 

ⓒ국립중앙박물관

02.『중국도설(China Ilustrata. 1667)』에 실린
마테오 리치(왼쪽)와 서광계(오른쪽)의 모습. ⓒ보스턴대학교 03.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를 조선에

서 1708년(숙종 34)에 모사한 서양식 지도(보물 제849호) ⓒ서울대학교 박물관

 

역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활동하는 인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지리도 마찬가지로, 역사지리학의 연구자 들은 시간의 최댓값을 인류의 탄생과 현재까지, 공간의 최댓값을 지구에 두었다(김종혁 공저 『역사지리학 강의』 39쪽). 이것을 생각해보면 역사와 지리는 결국 하나로 소통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역사와 지리를 결합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2차 함수 그래프의 x, y 좌표처럼 인간과 사물, 사상과 현상에는 시간과 공간이 내재되어 있다.

역사와 지리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면 인간의 여러 학문과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리의 분류 체계 만 봐도 우선 인문지리와 자연지리로 나뉘고, 다시 문화지리·사회지리·문학지리·도시지리·인구지리·식물지리·토양지리, 그 리고 지형학과 기후학 등으로 세분이 가능해 인간의 학문이면 거의 관련되어 있을 정도로 폭넓다. 이에 인간의 관점 에 따라 사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오래 전부터 당대의 사상과 현 상을 연구하기 위해 지리학을 탄생시켰다. 우리가 과거의 세계관과 사상을 이해하기에 당시의 지도를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지리라면 흔히 연상되는 것이 지도다. 자연현상과 인문현상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인 지도는, 정 확하게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기능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에 비춰진 세계를 그려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별 한 점이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이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소망 세계를 담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고지도를 주목하는 까닭은, 제작 당시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본 시선, 자연현상과 사상의 이해, 사고(思考 )의 흐름을 한 폭의 지도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유롭게 지도를 제작하는 것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던 조선시대에 행정기관과 같은 시설·구역을 자세히 또는 과장되게 그렸던 것은, 권력의 시선에서 공간을 표현 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또 고대부터 신성하게 여겼던 산과 하천, 제사 장소 등을 중요하게 표현한 것은 자연과 종 교, 제의(祭儀)가 단순히 물리적인 환경이 아닌 문화와 사상이 반영된 것이었음을 뜻한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다른 나라의 지도보다 유독 강조되어 있는 것도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성행한 풍수지리사상의 강한 영향 때문이다. 이렇 듯 지도를 펴고 지리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읽는 데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해주고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큰 지평이 되어 준다.

 

04. 조선 세종 때 지도 제작을 위해 평지 측량에 사용했던 기구인 기리고차의 모습(『한

국 미의 재발견-과학문화』 발췌) ⓒ솔출판사 05. 기리고차의 내부도를 보면 굉장히 과학적인 계측 구조를 가졌음을 

알 수있다. ⓒ솔출판사

 

동아시아의 천하관과 세계관

1602년 중국인들은 낯선 지도를 보았다. 높이 약 1.8m, 6폭의 병풍으로 만들어져, 크기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위 압감을 주는 이 지도는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보물 제849 호)』였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에 그려져 있었지만, 지도의 범위는 중국인들이 생각했던 직방(職方)을 훨씬 넘어 있 었다. 대륙과 국가들은 곡선 모습의 경위선 위에 그려져 있었으며, 주기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 일식·월식 과 구중천(九重天)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으며, 이를 믿지 않았거나 아예 못 본 척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결국 설득을 당했고, 그들이 믿었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 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천하관은 무너졌다. 그 빈 자리에는 ‘세계’라는 단어가 대신 들어서게 됐다.

‘세계’는 원래 불교 용어로, 세(世)는 시간, 계(界)는 공간을 의미한다. 세계는 시공간의 축으로 부처님의 세 상을 아우르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였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마테오 리치가 보여준 물리적인 세상(the world)을 표현 하기 위해 불교 용어였던 ‘세계’를 용기 있게 빌려 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세계’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이며, 조선시대에는 『세종실록』에 ‘미륵세계’를 설명하면서 나타난다. 부처님의 세상을 표현하던 ‘세계’ 용어가 불교 세계를 벗어나 인간의 바깥에 있는 물리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곤여만국 지도』를 통해 천하가 지리적으로 확장됐을 뿐만 아니라, 장소의 위치가 경위도 수치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게 됐다. 이제 마음속에 있었던 천하는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로 바뀐 것이다.

 

06.『동국지도』는 조선 영조 때 정상기가 만든 지도로, 우리나라 최초로 축척이 표시된 

지도다. ⓒ한국학중앙연구원 07. 14첩으로 만들어진 전국지도인 『동여도(보물 제1358호)』. 각각의 첩
은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지리 체계를 세워 국가체제를 완성하다

조선은 개국 이후 천문과 지리를 경국(經國)의 근본으로 삼았고, 이를 표현하고자 지도를 제작했다. 개국 4년만 인 1395년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그렸고, 1402년에는 당시의 천하를 그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했다. 또 『경국대전』을 완성하면서 중사(中祀)와 소사(小祀)의 제례 장소인 악해독(嶽海瀆)의 위치를 지도로 표현했는데 ,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려진 『동람도』이다.

조선 후기에 중국을 통해 소개된 천하의 새로운 모습에 대해 조선 지식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중국 에서 그려진 세계 지도를 보았지만 이의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모습의 세계를 그렸다. 추연(鄒衍)과 불가(佛家)의 세계와 함께 신대륙의 내용을 담은 지도를 만들어 낸 것이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원형 『천하도(天下圖)』이다.

조선은 마테오 리치의 지도 이후 1세기가 지나서야 새로운 모습의 세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708년(숙종 34) 에 모사된 회입식 『곤여만국전도』가 이를 보여준다. 이제까지 지도 제작 전통이 중국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던 조선은 경국의 기본이 국토의 상세한 지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18세기부터 고을지도를 만들기 시작했고 , 화원(畵員)들이 지도를 그렸기 때문에 회화식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지리 정보의 내용은 이전 지도와는 비교할 수 없었으며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상기(鄭尙驥, 1678~1752)는 동일한 축척의 도별 지도를 그려 『동국지도』로 완 성됐다. 18세기 후반에는 신경준(申景濬)이 모든 고을의 방안식 지도를 완성했고, 여기에 수록된 지리 정보는 대축 척 조선지도의 바탕이 됐다.

 

지도를 통한 지리 정보의 사회화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조선 지식인들은 서양인들이 갖고 있는 상세한 지도들을 보았다. 이를 통해 지도야말로 근대 국가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이며 동시에 국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임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전에 만들어진 고을지도를 합쳐 도별도를 만들고, 나아가 조선전도를 완성했다. 그리고 지도 의 제목에 ‘대동(大東)’을 붙여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해 갔는데, 『동여(보물 제1358호)』와 『대동여지도(大東輿 地圖)』가 이를 표현한 모습이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근대 시민사회를 완성하기 위해 지리 정보의 공유가 필수며, 지도가 권력 계층에 의해 독점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1861년(철종 12) 김정호(金正浩)가 목판본 『대동여지도(보물 제850호) 』를 탄생시킨 것은 권력의 지리 정보 독점을 거부한 지식인들의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열악한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는 지금의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 온다.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그려진 지도를 손에 들고 동아시아로 밀려든 서구 열강의 충격으로 전통질서가 동요하던 시 대에 이 지도는 국토와 고을의 평화로운 모습을 실감 있게 묘사한 것이다. 서구의 측량기술을 이용하지 않고 동양 전통의 방안 도법을 기초로 한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고집스러운 주체 의식의 한 일면이기도 했다.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진 후 11년 뒤인 1872년에 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전국 각 고을과 관방의 상세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지도는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국가의 경영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지도를 마지막으로 조 선의 지도 제작 역사는 사실상 막을 내린다. 그리고 빈 자리에 일본 제국주의가 그린 지도가 대신하게 됐다.

 

글 김기혁(한국고지도연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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