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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의 힘을 담은 문화재 - 테마기획 I
작성일
2007-02-2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494

테마기획 I
신앙의 힘을 담은 문화재

오며 가며 만나는 동네 어귀의 수호신들

 hspace=0 src=몇 백 년 묵은 아름드리 나무, 장대 끝에 얌전히 앉아 있는 새 한 마리, 퉁망울 눈에 주먹코를 지닌 사람. 이들의 이름은 각각 성황, 솟대, 장승이다. 얼핏 보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이들은 모두 마을을 수호하고 제사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여주며 사람들의 기원을 받아주던 영험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근대화와 새마을운동의 바람을 타고 미신 타파와 신작로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민속신앙의 대상물이었던 성황, 솟대, 장승은 점차 사라져 갔다. 이젠 외진 시골 마을까지 찾아가야 겨우 볼 수 있을 법한 이들에 대해, 민중들이 이어온 그 소박하고 기교 없는 역사를 만나 보기로 하자.

 hspace=0 src=너무나 신성하지만 너무도 일상적인, 성황
시골 마을들을 지나다 보면 마을 초입마다 몇 백 년 된 아름드리 나무가 서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떤 경우 그 앞에 조그마한 돌무더기들도 쌓여 있게 마련이다. 마을사람들은 그곳에 수호신인 성황신(혹은 서낭신)을 모시며, 그 나무와 돌무더기는 각각 수목성황과 누석성황[叢祠]으로 불린다. 또 그 신을 모신 당堂은 성황당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성황의 존재는 적어도 1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 열전에 보면 안종욱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욱이 자신이 죽으면 현 성황당 남쪽에 장사지내달라는 대목이 있다. 욱이 죽은 시기가 고려 성종 15년(996)이니 성황은 아마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성황 신앙은 마을마다 성황당을 두고 해당 지역과 관련이 깊은 인물을 성황신으로 모시는 특징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하회마을의 동제와 별신굿을 들 수 있다. 안동의 하회마을은 풍수적으로 항해를 나가는 배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배의 선수에 해당하는 부분에 성황당과 당나무가 서있고 이곳에 하회탈을 만드는 허도령을 사모했던 처녀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성황당에 매년 제사를 지내는 것을 동제(당제)라 하고, 부정기적으로 마을에 우환이 있거나 돌림병 등이 발생할 경우 신탁(신내림)에 의해서 거행하던 것을 별신굿이라 한다. 별신굿은 당제와 함께 탈놀이가 행해졌다. 탈놀이를 통해 성황신을 즐겁게 해드림으로써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하회별신굿 탈놀이다. 별신굿은 우선 신내림을 받기위해 성황당에 올라 신태에 당방울을 다는 일로 시작된다. 당방울이 울리면 신이 내린 것이다. 당방울을 다시 서낭대에 옮겨 달면 서낭대는 성황님의 신예가 되며 서낭대가 머무는 곳에서만 탈놀이가 행해진다. 마을사람들은 이러한 제의를 통해 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동시에 지역공동체의 동질감을 강화하고 결속력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성황신이 머무는 성황당이 이처럼 치성을 드리고 제사를 지내는 성역이기도 하지만 보통 때는 그냥 지나다 들르는 일상적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성황당에 대한 설화를 살펴보면 성황당은 그저 날이 저물어 머무는 곳이었으며, 비가 와서, 힘들어서, 술 취해서, 심지어는 그냥 들르는 곳으로까지 구연되어 왔다. 이처럼 성황당은 그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 매우 가깝고 친숙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hspace=0 src=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안테나, 솟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마을 공동체 신앙으로 전승되고 있는 동제洞祭에서 보면, 성황당에 모시는 산신을 최고의 신으로 여기며 그 하위신으로 솟대와 장승을 모시고 있다. 즉, 마을 어귀에는 이미 살펴본 성황뿐만 아니라 솟대와 장승도 함께 설치된다는 의미이다. 솟대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대상물을 일컫는다. 마을 사람들은 이 솟대를 하늘과 인간의 통신 안테나로 생각하고,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제洞祭를 모실 때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기원하며 마을 입구에 솟대를 세웠다. 솟대 끝에 앉은 새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오리를 위시한 다양한 물새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솟대를 오릿대라고도 한다. 오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새이자 물새이므로, 홍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불사조로서 마을을 홍수나 화재와 같은 재해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다. 또한 오리는 알을 많이 낳는 다산의 대표적인 새로, 오리알은 불멸성·잠재력·생식의 근원과 같은 상징성을 지닌다. 따라서 당산제와 같은 제례 의식에 오리의 알받이 구멍을 파고 곡물을 담아 놓는 것에는 생산과 풍요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솟대의 의미와 기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중요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는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서문안당산이다. 이 당산의 경우, 돌로 만든 솟대와 선돌 한 쌍과 장승 한 쌍이 같이 서 있는데 솟대와 선돌에는 1689년(숙종 15년)에 세웠다는 명문이 남아 그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려주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높다. 머리를 바다 쪽으로 향한 오리를 조각한 할머니 솟대 당산은 물새인 오리의 성질을 빌어 부안 읍내의 화재를 예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 당산의 받침돌에는 알받이 구멍이 있어 당산제를 지낼 때 쌀을 담아 풍농을 기원하였다. 그런데 솟대의 경우, 성황이나 장승에 비해 오늘날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로 보아 일찍이 그 의미가 축소·소멸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 없다.

 hspace=0 src=수호신이 된 민중의 얼굴, 장승
인사동 거리의 초입에 가면 전남 나주의 불회사 석장승을 그대로 본떠 만든 장승 한 쌍이 세워져 있다. 불회사 장승의 경우 사찰의 경계가 시작됨을 알리는 동시에 성역의 입구임을 알려주는 것이겠지만, 인사동 장승의 경우는 그곳부터 인사동거리가 시작됨을 알리고 인사동이라는 동네를 수호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즉, 장승은 마을 수호신의 기능을 하는 마을장승부터 사찰의 경계나 사찰 소유의 토지를 표시하는 사찰장승, 일정한 거리마다 세워 거리 수를 표시하는 노표장승, 풍수지리설에 의해 세운 비보장승, 성문 밖에 세워 성을 지키는 수문장장승 등의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주로 나무나 돌로 제작하는 장승은 그 명칭도 다양하다. 시대별로 신라~고려~조선 전기까지는 주로 장생, 조선 중후기에는 장승으로 불렸다. 지역별로는 평안도에서 당승, 영호남에서는 벅수 혹은 벅시, 충청도에서는 수살막이,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 등으로 부른다.
장승은 개화와 근대화 바람으로 미신이나 구습으로 백안시되어 사라져 가다가 최근에 다시 관광상품으로 부활하여 오늘날 여러 관광지나 음식점, 공원 등에 기념물로 세워지고있다. 그들의 형태는 하나같이 부리부리한 눈에 엉성한 이와 과장된 입 모양을 한 기괴한 도깨비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각 지역에서 보는 장승의 모습은 그다지 기괴하거나 위압적이지만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장승의 모습을 보면, 일단 나무장승이든 돌장승이든 사람의 얼굴을 변형하여 수호신상으로 상징적인 표현을 하고, 몸체에 이름을 적어 넣는 것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다. 얼굴의 경우 보통 툭 불거진 퉁방울 눈, 주먹코, 삐져나온 송곳니와 앞니, 머리에는 관모형이나 전립형의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는 곧 사람의 모습을 빌어 만들면서 의도적인 왜곡으로 장승의 이미지를 창출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왜곡과 과장을 통하여 장승 제작자들은 도깨비나 사천왕과 같은 수호신상형이나 민중의 자화상적 이미지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장승의 민속적 모습은 신격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어 경남이나 전남 지역에서 장승을 의미하는 ‘벅수’가 ‘키만 멀거니 큰 바보’라는 의미로 사용될 만큼, 경외심보다 친근감이 강화된 의미 전환이 나타나기도 한다. 앞서 예로 든 부안 서문안당산의 할머니·할아버지 장승의 볼 늘어진 인자한 얼굴, 나주 불회사 할머니 장승의 이가 빠져 주름진 입술과 할아버지 장승의 길게 땋아 내린 수염은 친근하고도 해학적인 당시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성황과 솟대, 장승은 수백 혹은 수천 년간 소박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전국의 부락을 수호하고 각 지역의 민속신앙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는 많이 쇠락한 모습으로 21세기를 맞았다. 지배층이 남긴 화려하고 정교한 문화재들도 좋지만, 이제 민중이 신앙하고 민중에 의해 유지되며 소리 없이 우리네 곁을 지켜온 민속신앙에도 눈을 돌려보자. 그 안에 스며 있는 조상들의 기교 없는 모습에 따스한 웃음이 배어 나올지 모를 일이다.

글·이 인(자유기고가) / 사진·장명확(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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