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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주 고달사지 답사기 - 우리문화 탐방
작성일
2005-12-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277

천년의 겁을 뛰어넘는 고달사지高達寺址로의 여행

일부문도 천왕문도 없다. 모시고 있는 부처님도 있지 않다. 그 옛날 사방 30리 대가람으로서의 웅장함은 간데없고 대좌와 부도 등 몇 개의 흔적만이 초라하게 남아 쳔년 세월의 역사를 조용히전해 줄 뿐, 혹시 모를 일이다. 휑하니 잡풀 무석한 고달사지에 가만 서있으면 휘이도는 바람을 타고 신라고승들의 나지막한 염불소리 들려올지도...





매년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여주에 있는 신륵사와 영릉을 다녀가지만 옛 산사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혜목산 아래에 있는 폐사찰 고달사를 찾는다. 폐사지를 찾는 즐거움은 현재의 모습보다 과거의 모습을 상상 속에 구성해 볼 수 있다는 즐거움과 쓸쓸히 서 있을 석물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보는 여유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위치한 고달사지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어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중기까지 중부지역 최대 사찰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고찰이었다. 모든 절들이 그렇지만 처음 참배객을 맞는 것은 일주문, 천왕문이다. 이곳을 지나 들어가면 연지蓮池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고달사는 이들을 맞아줄 일주문도, 천왕문도, 참배할 부처님도 있지 않다. 전각과 법당은 주춧돌로써 자신의 모습을 남겨 놓았을 뿐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달''이라는 석공이 가족들이 굶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오직 불사에 혼을 바쳐 완성된 사찰로''고달''에 의해서 많은 석조물들이 세워졌을 것인데,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은 석불대좌(보물 8호)와 원종대사부도비의 귀부와 이수(보물 6호), 그리고 고달사터 부도(국보 4호)와 원종대사 부도(보물 7호) 뿐이다.

   절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신라시대 이래 나라 안 큰 사찰 세 곳 중 하나인 고달원高達院으로 불린 기록이 있으며, 언제 폐사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현재까지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보면, 17세기 이후의 유물이 전무한 것으로 봐서 그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7권 - 경기[2]-[여주목]에 ''취암사·상원사·고달사는 모두 혜목산에 있다''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중기까지 수행도량으로 있었으며 규모로는 <봉은 본말사지>에 혜목산 일대 ''사방 30리 절터''의 웅대한 가람이었다는 기록으로도 거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문은 1998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발굴조사가 마무리되면 사찰의 규모와 많은 궁금증들이 풀어질 것이다.

   현존하는 고달사의 석물들은 모두 크다. 그저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람하다. 처음 만나는 석불대좌는 높이가 1.57m나 된다. 상대와 중대 하대를 모두 갖춘 고려시대의 사각대좌이다. 대좌위에 앉아 계셨을 부처님의 모습이 어떠한지 또, 석불이었는지 철불이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지만, 좌대의 높이로 따져보아도 2m 가까이 될 거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국내에서 가장 크고 잘 생긴 대좌로 평가받고 있으면서도 연꽃무늬 조각으로 인해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고려시대 연꽃무늬의 특징인 하대석 각 면의 안상과 복련, 상대석 각 면의 안상과 앙련의 살아있는 복스러운 연꽃무늬 때문이다. 석물 바로 서북쪽에는 원종대사 부도비 귀부와 이수가 자리잡고 있다. 1915년에 깨어진 비신은 지난달 개관한 용산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보존처리를 기다리고 있다. 받침돌의 거북은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을 하고 단단히 버티고 있다.

   멀리 산 능선에 있는 고달사터 부도(국보 제4호)와 원종대사 부도(보물 제7호)는 고달사를 찾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부도인 고달사터 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섬세하고 화려한 고려시대의 부도 양식을 보여 준다. 13개의 건물지와 탑지, 석등지, 장대석 및 축대 등이 그 흔적을 적나라하게 노출한 웅대한 대 가람의 마지막이며 오래도록 머물고 둘러 볼수록 그 조각술에 빠져드는 부도이다. 고달사터 부도는 하대석 위에 석불대좌와 같이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석에는 거북炤吟구름이 조각되어 있는데 거북과 용의 생동감 있는 표현에 조각술의 뛰어남에 말문이 닫힌다.


   상대석에는 연꽃이 표현되어 있다. 그 위의 몸돌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으며 그 사이마다 자물쇠 문양과 사천왕상․영창(映窓-방과 마루 사이의 두 쪽 미닫이의 창)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 천정에는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지금도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쉬운 것은 부도의 이 곳 저 곳에 탁본의 흔적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학생들에서부터 연구하는 사람들까지 아름다운 조각의 탁본은 누구에게나 한 장쯤 가지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 뒤처리도 제대로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하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2002년에 도굴을 당하면서 깨어진 상륜부이다. 복원되었다지만 깨어진 조각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황량한 폐사찰을 관심과 애정으로 돌보며 지켜가는 문화재지킴이 분들이 더 많이 계셔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고달사는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도의 경지를 통달한 귀부의 야릇한 미소에 불법의 힘이 느껴진다.

이영철 / 우리얼 운영위원, 현대불교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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