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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둑의 대중화에 기여한 조선시대 프로 바둑기사
작성일
2023-07-3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902

바둑의 대중화에 기여한 조선시대 프로 바둑기사 바둑기사는 바둑을 직업으로 삼아 전문적으로 두는 사람이다. 국내외 바둑대회에 참가하여 다른 프로 바둑기사와 서로의 바둑 실력을 겨룬다. 조선시대에도 내기 바둑, 기객 등으로 바둑을 생계 수단으로 삼은 프로 바둑기사가 있었다.

프로 기사, 바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다

바둑은 오랜 옛날 고대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요순시대에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어리석은 아들 단주와 상균을 깨우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농경사회에서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별자리 표시 기구가 변하여 바둑이 발명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바둑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사람들이 바둑을 즐겼다는 내용이 중국 문헌인 『북사』 「백제전」, 『신당서』 「고구려전」, 『구당서』 「신라전」 등에 기록되어 있다.


바둑은 고려 때 여성도 즐길 만큼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시대 들어서도 궁중과 양반 사회에 널리 퍼지면서 온 가족이 즐기는 놀이가 되었다. 고려 때부터 바둑 잘 두는 사람을 ‘국수’라고 불렀다. 국수라면 바둑계를 평정한 최고수를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덕원령, 유찬홍, 정운창 등 손꼽히는 국수가 여러 명 있었다.


그중에서도 조선 제일의 고수는 정조 때의 정운창이었다. 사촌형에게 바둑을 배운 그는 바둑에 푹 빠져 5~6년 동안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바둑에 몰두했는지 먹고 자는 것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10년 만에 실력을 키워 세상 밖으로 나온 그는 전국 곳곳을 누비며 바둑의 고수들을 모두 물리쳐 국수가 되었다. 정운창은 조선 최초의 프로 바둑기사로 꼽히는데, 내기 바둑을 하여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바둑을 좋아하는 고관과 부자들은 많은 상금을 걸고 고수들을 불러들여 바둑대회를 열었다. 정운창은 평안감사의 주선으로 평양에서 ‘바둑의 신’이라 불리던 김종귀와 대결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승리를 거두어 상금으로 집 한 채 값이 넘는 백금 20냥을 받았다.


이렇듯 바둑기사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운창처럼 바둑을 생계수단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역의 후원자들로부터 생활비를 받아 생활했는데, ‘바둑을 두는 식객’이라 하여 ‘기객’으로 불리었다. 내기 바둑만으로는 생계에 어려움이 있기에 기객이 된 바둑기사들은 고관이나 부자들이 주최하는 바둑대회에 나가 두둑한 상금을 챙겨 여유 있게 살아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바둑은 예로부터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바둑돌을 미리 배치하고 두는 순장바둑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대 바둑으로 전환하였고, 해방 후에 한국기원이 발족하여 프로 기사들을 배출하면서 오늘날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조선 후기의 바둑기사는 바둑을 기예로써 하찮게 여기던 때 각고의 노력으로 바둑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 바둑을 생업으로 삼은 프로 기사였다. 이들이 프로 정신을 발휘하여 눈부신 활동을 함으로써 바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바둑의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


00.『일사유사』 한말에 언론인으로 활약한 장지연의 『일사유사』에는 덕원령, 유찬홍, 윤홍임, 김한흥, 고동, 김만수 등 조선 제일의 바둑기사들이 등장한다. 이 책에는 이들 고수가 바둑을 둘 때는 “구경꾼이 고슴도치 털처럼 빽빽이 모여들어, 담장처럼 에워싸고 발을 포개 서 있을 지경이었지만 하루 종일 떠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국수로서 명성이 자자하여 이들이 가는 곳마다 구경꾼이 앞다투어 모여들어 바둑 두는 법을 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


글. 신현배(역사 칼럼니스트, 아동문학가) 일러스트. 박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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