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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시대를 초월한 ‘수원 화성’의 가치
작성일
2016-02-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0116

시대를 초월한 ‘수원 화성’의 가치 역사 속 이야기가 풍성한 유물과 유적이 있다. 바로 수원 화성(華城)이다. 화성은 조선 건국과 함께 조성된 수도 한양에 버금가는 도성으로 조선 후기 계획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오늘날의 시각으로도 감탄할만한 상세하고 완벽한 공사 보고서를 남겼다 화성이 온전히 복원되어서 우리의 후손들도 조상덕을 누리며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날을 기대해본다

 

화성의 시작과 웅장한 범위

수원 화성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 18년에 착공하여 2년 9개월 뒤인 1796년 정조 20년에 완공됐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화성 신도시의 대역사는 1789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배봉산(拜峰山)으로부터 화산(花山) 아래 현재의 융릉(隆陵)에 이장하고, 그곳에 살던 화산 거주민들을 지금의 수원 팔달산 아래로 이주시키면서 시작됐다. 그 후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799년, 현재는 서호(西湖)라고 일컫는 저수지, 축만제(祝萬堤)의 건설과 함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화성의 공간적 범위 또한 좁게는 장안문(북대문), 팔달문(남대문), 창룡문(동대문), 화서문(서대문)의 4대문을 잇는 5.7km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내부에 국한되겠지만, 넓게는 화성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성곽 바깥으로 조성된 저수지와 둔전등의 농업기반 시설에까지 확장하여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문화적 맥락을 더하면 창덕궁으로부터,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하여 조성된 사찰인 용주사를 거쳐 융릉에 이르는 정조의 능행길을 포함시킬 수 있겠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소상히 기록된 「화성성역의궤」

역사적·문화적 가치와 더불어 수원 화성은 계획 및 설계로부터 시공에 이르는 전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기록으로 인하여 엄청난 건축기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공사 일정, 공사에 종사한 감독관의 인적 사항, 공사수행 중 오간 공문서와 왕의 명령, 상량식 등의 의식, 각 건물의 공사에 직종별로 참여한 장인의 이름과 출신지와 작업 일수, 사용된 자재의 수량 및 단가, 전체 공사비용의 수입과 지출 내역 등이 꼼꼼하게 기록되어있다. 또한 사용된 건설장비의 얼개와 기능 및 수량 그리고 각 건물에 대한 설명이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되어 있다. 18세기 말 조선에서 작성된 이 정도의 공사기록을 남긴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또한 정조의 명에 따라 수원 화성의 기본계획을 설계한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엔지니어링 교육을 받은 바 없었지만 축성 공사를 위한 건설장비 다수를 창안하여 공사 기간의 단축과 공사비용의 절약에도 한몫하였다. 이를 위하여 정조는 중국에서 구입한, 서양의 발달된 각종 기계장비들을 소개한 기기도설(奇器圖說)이라는 기술서적을 다산에게 하사하였고, 다산은 이를 참고하여 화성 건설을 위한 장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군주는 설계 목표와 함께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신하는 이를 연구하여 설계안을 내어놓고, 다시 군주는 이에 대한 비평을 가하여 설계를 완성하였으니 오늘날 공학교육의 좋은 사례이자 다양한 학문 분야의 융합·복합 모델로서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완벽한 공사기록은 건설 당시 그 건축물이 어떻게 지어졌는지를 일러줄 뿐만 아니라 그 건축물을 복원하거나 보수하여야 할 경우 안내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매우 유용하다. 실제로 수원 화성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성벽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시설물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원본에 근접하게 복원된점이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만일 「화성성역의궤」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소위 전문가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복원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이를 원본에 가깝게 복원된 근거라고 주장하는 취약한 논리로는 유네스코를 설득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수원 화성의 이야기는 정조의 능행 출발지점인 창덕궁으로부터 시작하여 노량진을 거쳐 사당사거리, 남태령 고개, 과천행궁, 인덕원 사거리(또는 노량진을 거쳐 안양), 군포, 지지대 고개, 화성성곽, 용주사 그리고 종착지인 융릉에 이르는 길을 따라 완성되기에 이 모든 곳을 복원의 범위에 넣어야 할 것이다. 인위적으로 훼손된 남수문과 만석거(萬石渠)는 당연히 복원되어야 한다. 그리고 능행길을 따라 이야기의 옷을 입혀야 한다. 화성이 온전히 복원되어서 우리의 후손들이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날을 기대해본다.

 

글‧김장훈(아주대학교 건축학과) 사진‧토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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