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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유산 다시보기(제주편)
작성일
2006-04-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599



조선시대 왜구 침입의 방어유적을 찾아서

한반도 남쪽 섬 제주는 지리적 특성상 변방으로의 숙명을 안고 살아야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 지역 특성상 언제 어디로 침략해올지 모르는 외적에 대하여 늘 자신들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탓에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섬 제주에는 아직도 많은 방어시설들이 아픈 기억의 역사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제주의 해안방어시설은 3성城 9진鎭 25봉수烽燧 38연대煙臺 1장성長城으로 요약될 수 있다. 3성은 행정과 군사목적을 동시에 갖춘 읍치의 성으로 아직까지도 제주성濟州城, 대정현성大靜縣城, 정의현성旌義縣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9진은 제주도내 9개의 해안요충지에 설치된 군사행정구역이다. 이런 시설들은 무엇보다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 말부터 설치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에 본격적인 정비가 이루어졌다. 중종과 명종 때의 대대적인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으며, 19세기 이양선이 출몰하던 시기까지 계속 정비되어 왔다. 후기 왜구 침입의 역사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제주읍성의 동쪽 성벽 밖 해자였던 산지천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제주읍성의 동쪽 성벽 밖 해자였던 산지천>
교과서적인 상식으로 왜구의 출몰시기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제주지역에 왜구의 침입은 조선중기에 집중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미 고려 말 최영장군이 제주의원나라 적군을 토벌하기 위해 전함 314척, 정예병 25,605명을 동원하여 바다를 건널 정도의 상태에서 소규모의 약탈 선단은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왜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 약탈이 어렵게 되자 그들은 생존방식을 바꿔 교역으로 눈을 돌렸다. 이러한 변화는 왜구의 구성에도 변화를 주는데, 일본인뿐만이 아니라 일부 중국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왜구 집단에 참가하게 되고, 주 활동무대를 중국의 동남해안으로 옮기는데, 이를 후기 왜구라고 부른다. 제주지역에 빈번하게 침입하던 왜구는 후기 왜구를 주로 칭한다. 이들의 길목에 제주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 5년(1510년) 동래, 울산, 창원에서 교역을 하던 왜인들이 교역조건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일으킨 삼포왜란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지역에도 왜구에 대한 방어대책이 긴급히 마련되고, 방어시설에 대한 점검에 들어가게 된다.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왜구들이 상륙하였던 화북포구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왜구들이 상륙하였던 화북포구>
명종7년(1552년) 5월 현재의 남제주군 성산읍 신천리 일대로 중국인과 포르투갈인을 포함하여 약 200여 명의 왜구가 침입하여 주민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삼미포왜변). 이 일로 인하여 당시 정의현감 김인과 제주목사 김충렬은 유배형을 받았는데, 제주목사 김충렬의 후임으로 온 사람이 남치근南致勤이다(임꺽정을 죽인 인물이다). 명종 9년(1554년) 한 번 맛을 들인 바로 그 왜구 집단이 천미포로 재차 상륙하자 이 일대의 방어병력을 동원하여 왜선 2척을 나포하고 다수의 왜구를 사로잡게 된다(2차 천미포왜변). 이어 명종 10년(1555년) 6월 60여 척의 배에 나눠 탄 1,000여 명의 왜구가 화북포로 침입한다(을미왜변). 이들은 바로 한 달 전인 5월에 전라도 영암, 강진, 장흥을 유린하며 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을 전사시킨 바로 그 집단이었다. 이들은 바로 화북포구를 유린하고 제주읍성으로 진격하였고, 제주읍성 동문 밖에서 3일간의 격전 끝에 제주목사 김수문의 지휘 하에 있던 제주지역 군졸들에게 패배한 왜구는 배 9척을 나포당하고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왜구들은 1556년에도 또 다시 침입하였으나 이번에도 김수문 목사의 지휘하에 왜선 5척을 불태우고 왜구 126명을 죽였다(병진년왜변). 그리고 1592년 미증유未曾有의 임진왜란이 발생한다. 관문과 방어시설

화북진和北鎭과 조천진朝天鎭은 조선시대 제주의 2대 관문이었다. 육지로 나가는 배는 주로 화북과 조천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바람이 맞으면 출항하였고, 제주로 들어오는 배는 완도나 해남에서 출발하였다. 추사 김정희나 면암 최익현도 화북을 통해 제주 땅에 들어왔다. 조천은 조선시대 제주의 최대 교역포구였으며,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왜구가 상륙한 지점이기도 하다. 해류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제주읍성과 가장 가깝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포구에 규모와 성격에 걸맞지 않게 성벽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리고 화북진성의 경우 숙종 4년(1678년)에 와서야 만들어진다. 오히려 좀더 동쪽에 자리 잡았던 별방진別防鎭이나, 서쪽 끝에 있는 명월진明月鎭이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그 크기와 규모도 크다. 아마도 그 이유는 주변 지역에 상호 지원을 할 수 있는 방어시설의 존재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흔적이 남아 있거나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진성은 화북진성, 조천진성, 별방진성, 수산진성, 명월진성, 애월진성이며, 서귀진성, 모슬진성, 차귀진성은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봉수烽燧와 연대煙臺 봉수와 연대는 모두 연기와 횃불로 비상 상황을 알리던 전래의 통신수단으로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사용하였다. 봉수는 약간 산 쪽에 위치하여 50리 밖의 먼 곳을 감시하던 시설이며, 연대는 주로 해안가 언덕에 만들어져 다가오는 배의 정체를 현장에서 확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면 이곳에 근무하던 병력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자료에는 각 별장 6인과 봉군 12~36명으로 구성되고, 6개조로 나뉘어 매달 5일씩 근무하였다고 한다(별장 1인과 봉군 2~6명이 상시 주둔한 것인데, 이는 당시 인구수준으로 결코 적지 않은 수이다). 25기의 봉수는 현재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은 없고, 연대 중 7~8기 정도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환해장성環海長城 환해장성環海長城은 길이 250km 가량에 높이가 2~3m 정도 되는, 제주해안선을 한 바퀴 완전히 두르고 있는 돌담 방어벽이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 다시 고려관군을 막기 위해 삼별초가 계승하고, 조선시대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 다시 쌓았다. 일부지역에서는 해풍을 막기 위해 재 축성하였고, 조선 후기 이양선이 출몰하자 재차 수리하며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침투하는 무장공비를 막고자 전투경찰과 방위병들이 그 임무를 이어받아 불과 얼마 전까지 열심히 수리하며 장성을 쌓았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제주를 둘러싸려고 한 돌담벽의 모습들이. 그러나 지금은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해안도로를 뚫으면서 기초공사 재료로 사용되고, 해안가에 넙치 양식장과 펜션 등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일부 한적한 해안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제주사람들의 눈물로 쌓아올린 방어시설 제주지역은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조선시대에 상당한 군역이 부과되는 지역이었다. 김상헌의 『남사록』(1601년)에는 제주의 남자 인구 9,530명 중 군인의 수는 7,444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모든 남자들이 군역을 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를테면 70살 봉수군, 7살 보인(保人=예비군)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또한 이 기록에서는 “만약 사변을 만나 성을 지키게 되면 민가의 건강한 부녀자를 골라 성을 지키게 하였다.”는 구절도 있다. 현재 남제주군 남원읍, 표선면, 성산읍, 북제주군 구좌읍 일대의 옛 행정지명인 정의현성은 세종 5년(1423년)에 축성되었다. 정의현 사람뿐만이 아니라 제주3읍 전체에서 사람들이 동원되어 성을 쌓았는데, 물론 보수와 숙식제공은 없었다. 특히 구좌읍 하도리 별방진성은 기근이 겹친 시기에 탐관오리로 지목되어 파직되었던 목사의 지휘 하에서 심지어 자신의 대소변을 먹으면서 울면서 쌓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뿐인가? 수산진성 동벽과 남벽이 만나는 지점의 성벽 안쪽에는 ‘진안할망당’이라는 신당神堂이 있다. 폭 6.1m, 담 높이 2m 크기의 원형의 당으로 ‘할망’(제주 방언으로 할머니)을 무속신으로 모셔둔 당堂이 있어 이를 ‘진안할망당’이라고 부르는데,‘수산진성’을 쌓을 당시의 슬픈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옛날 수산리에 진성을 쌓을 때의 일이다. 성을 쌓기 위해 관에서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공출을 받았는데, 대부분이 곤궁한 형편이었지만 유독 더 어려운 집이 있었다. 마침 그 집에 공출을 받으러 온 관리에게 여인은 아무것도 없으니 정 그렇다면 아이라도 가져가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관리는 할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날 이후로 성을 쌓기만 하면 자꾸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하루는 근처를 지나던 스님이 원숭이띠 아이를 바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관리는 아이를 바치겠다던 여인이 생각나 그 집으로 가서 물어보니 그 아이가 바로 원숭이 띠였다. 자식을 빼앗긴 여인의 처절한 몸부림과 눈물을 뒤로하고 아이를 데려다 땅에 묻고 그 위에 성을 쌓았다. 제주를 왜구로부터 지키고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성은 무너지지 않았고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은 완성됐지만 언제부터인지 그 성에서 자꾸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을의 한 부인이 성 담벼락 아래 음식을 차려 놓고 원혼을 위로하니 그제서야 울음소리가 그쳤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자리에 당을 세우고 모시게 되었는데, 바로 그 곳이 ‘진안할망당’이다.



제주를 지키기 위한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제주와 자식을 맞바꾼 애끓는 모정 때문일까? ‘진안할망당’에는 ‘관운官運의 영험함’이 있다고 믿어온 의식은 후세 사람들에게도 이어져 아예 이 당 앞에 동네사람들은 수산초등학교를 세우게 되고 덕분에 성벽을 울타리로 둔 국내 유일한 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입시철이 되거나 공무원 시험이 있으면 그 영험함을 믿고 의지하며 빌러오는 사람들로 당은 호황을 누리곤 한다.

이렇듯 제주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많은 방어시설을 피와 눈물로 쌓아 올렸다. 제주 해안에 산재해 있는 방어시설들은 이런 아픔의 흔적이다. 허물어진 성벽 담, 흔적만 남은 봉수, 그리고 무속의 힘을 빌어서라도 물리치려고 기원을 올렸던 신당 등은 우리에게 요구한다. 겉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가 주는 근사한 풍경과 이국적 낭만 뒤에 무수한 아픔과 슬픔을 품고 있는 제주의 한 많은 사연을 기억하라고, 제주를 지키기 위해 처참한 고통을 겪어야했던 옛 제주사람들의 아픈 속내를 위로하라고… 취재 / 편집실 지도설명 조선시대 제주도 왜구 침입의 방어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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