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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로 얼싸안아라! 인류애를 추구한 대표적 음악
작성일
2019-05-3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334

서로 얼싸안아라! 인류애를 추구한 대표적 음악: 베토벤 9번 교향곡 토마스 만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사람들이 인간적이라고 일컫는 것. 그것이 비록 선하고 고상할지라도 [...] 그것이 무효화되어야 하네. 내가 그것을 무효화해버리겠네. [...] 그 9번 교향곡.”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기에, 인간에게 가장 유의미한 것을 더 이상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주인공은 이 음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탄생 이래 줄곧 그 의미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음악이 여흥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숭고함, 나아가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는 중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 또는 수행하여야 하는지는 이 작품과 관련하여 아직도 열려 있는 질문이지만 그 방향성은 분명하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적 화합의 추구. 01.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악보. ©위키백과 02.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독일의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eethoven) ©위키백과

고난의 극복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독특한 점을 많이 지니고 있다. 우선, 이 음악을 만든 작곡가 베토벤이 당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귀가 먼 상태에서 대부분 머릿속의 상상만으로 음악을 구성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화음이나 악기소리 등을 감각적으로 거의 확인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것은 베토벤에게 현실적 장벽만을 뜻하지 않았다. 음악가로서 청각을 상실하였다는 자괴감 속에서 이 작품을 그것에 대한 대응으로 완성하였다. 실제 초연에서도, 그가 비록 무대 위에서 지휘 동작을 하였지만, 그는 울리는 음악의 실제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작품과 함께 인류가 기억해야 할 하나의 진실이 있다. 고난은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으며 최악의 형태로도 나타나지만 극복의 대상이지 결코 종속의 대상이 아니다.


긍정적 방향의 진화

다음으로, 교향곡이라는 순수 기악곡 장르에 합창이 함께 들어 있다. 교향곡은 전통적으로 기악 음악의 최첨단에 서 있었고, 성악 장르와 비교할 때도 목소리 대신 악기들이 연주하는 오페라로 여겨졌다. 음향적 아름다움의 추구에 가사가 있는 성악이 포함되었으므로, 장르 구분의 관점에서 생경함과 새로움이 거론되는 것은 당연하다. 베토벤이 이 작품을 9번 교향곡으로 발표하였지만 사람들은 그가 교향곡의 순수함과 음향 구성의 장점을 던져버린 것은 아닌지 의아해 하기도 했다. 역설적인 것은 교향곡 발달의 역사에서 최고의 작곡가가 곧 베토벤이며, 그 이전 및 이후의 누구도 이 분야에서 베토벤을 능가한다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교향곡은 모두 아홉 곡에 불과하지만 이전에 수십 곡 이상을 쓴 작곡가들의 작품과 차별화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교향곡들은 지속적으로 각자 개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다음 작품’이 매번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 만약 그가 더 살아서 10번 교향곡을 만들었다면 어떤 형태가 되었을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을 떠올리며 인류가 기억해야 할 원리가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고 긍정적 방향의 진화도 불가능하다.

고난은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으며 최악의 형태로도 나타나지만 극복의 대상이지 결코 종속의 대상이 아니다

대중성과 공공의가치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은 대중적 연주회를 바탕으로 수익을 얻는 음악 매니지먼트 방식이 동원되었으나, 이 작품이 전하는 바는 보편적 인류애와 관습타파라는 것 이다. 말하자면 도덕적 음악과 상업적 흥행이 같은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는 작품이다. 초연을 준비하던 중, 베토벤은 빈의 청중이 점차 자신의 음악언어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여겨 연주 도시를 다른 곳으로 바꾸려고 하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이 교향곡의 연주회가 성황을 이룰 것이라고 설득하였으나, 청중이 외면하는 음악회의 한계를 아는 베토벤은 쉽게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에 빈의 지성인들이 공개적으로 신문에 탄원서를 발표하였다. 그들은 당시 신분사회를 고려한 지위 우월성을 다 던져버리고 베토벤의 음악에서 위대한 것을 기꺼이 배우려고 하였다. 이 작품의 수용과정을 통하여 인류가 기억해야 할 지향점이 있다. 어떤 예술 작품이든 그 대중성이 장기적으로 공공의 가치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공공의 향유를 위해서, 위대한 것 그리고 완결된 것의 솟구치는 의미를 위해서 당신의 손에 의한 최근 대작들의 공연을 그리 오래 주저하지 마십시오. [...] 우리는 당신의 장려한, 아직 도달하지 못한 교향곡들의 화환에서 하나의 새로운 꽃이 반짝이며 드러나고 있음을 압니다.”



예술 음악의 보편화

이 교향곡의 4악장에서 베토벤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편집하여 가사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성악부 분 이 나오는 맨 앞에 자신이 직접 써넣은 구절이 있다. “오 친구들이여, 이런 음들이 아닐세! 보다 아늑한 것을 우리 노래하세, 그리고 보다 환희에 찬 것을.” 이 작품은 음악으로 희망과 평화를 전하는 최초의 교향곡이다. 이전에 고급 음악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한 음악은 문화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수준에서 일반인이 범접하기 어려웠다. 표현 내용 역시 예배나 행사에 종속되거나 자체적 아름다움(자율적 음악미)이 중심에 있었다. 인류 전체를 향하여 어떤 가치를 공표하는 예술로서의 음악이 그 구체적 모습을 보인 것은 아마 이 작품이 처음일 것이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이러한 사고전환의 상징적 음악이기에 서두에 소개한 『파우스트 박사』의 주인공은 절망하면서 이 교향곡에 인류의 가치를 묶은 것이다.

그의 음악은 후반부로 갈수록 인간에 대한 긍정의 의지, 포괄적 사랑을 담고있다.

음악, 특히 단일 음악 작품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해당 작품의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획일적이지 않다. 작곡가의 생존때부터 크고 작은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베토벤은 그의 후기 작품이 청중에게 저절로 즐겨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의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랐고, 그러한 사람의 수가 당장은 적을 수 있음도 각오했다.


자신이 음악적으로 진화하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혁신을 추구하면, 그만큼 청중과의 거리감이 생길 수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특히 9번 교향곡을 포함하여 그의 후기 작품은 진리를 설파하는 강연에 가깝다. 그의 음악은 후반으로 갈수록 인간에 대한 긍정의 의지, 포괄적 사랑을 담고 있다. 그의 9번 교향곡은 이러한 가치지향성을 지닌 대표적 작품이다.

03. 포르투갈의 포르투에 있는 리볼리 극장(Rivoli Theatre)에서 9번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는 이노 사비니(1955) ©위키백과 04. 빈 운가르 거리의 한 건물에 설치 된 베토벤 기념 동판 ©위키백과 05.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곡 중의 하나로, 도덕적 음악과 상업적 흥행이 같은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는 작품이다. ©위키백과

멈추지 않는 활용

음악이 이념에 편승하거나 이념이 음악을 끌어들이는 경우는 오늘날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넓은 지지를 받는 다양한 이념들이 관여한다. 소위 베토벤 끌어들이기의 선봉에 9번 교향곡이 위치한다. 물리적 사회 변혁을 꿈꾸던 혁명 세력의 정신을 잇는 음악으로, 산업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의 희망을 담은 음악으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옹호하는 음악으로, 심지어 나치의 전쟁 명분을 드높이는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구 동서독의 국가 대용음악으로, 4+2(연합국 및 동서독) 연합오케스트라 연주에 의해 동서냉전의 마감을 알리는 ‘자유의 송가’로 쓰였고, 유럽연합의 국가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연말연시에 연주되는 것도 이 작품의 그러한 성격을 잘 나타낸다.


문헌적 기록물의 관점에서 보면 이 기록유산은 악보와 음반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인류에게 전하는 바는 사실 그 정신에 있다. 숭고한 가치 지향적 내용을 음악으로 표현하여 소통시키고 그 파장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의 공동 유산인 셈이다. 어떤 세계기록유산이 우리 인류에게 계속 기억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곧 현재에도 인류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느 한 지역, 구성원, 시대 또는 이념이나 유행 등에 국한되지 않고 두루 되새길 수 있는 문화물이 세계의 기억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 맥락에서 보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이미 수행한 역할만으로도 인류의 기억속에 길이 살아 있을 만하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우리 인류가 공동체적 이상을 드높이며 화합을 도모할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어 서로 얼싸안으며 환희를 향유하는 계기마다 이 음악이 기억될 것이다.



글. 주대창 (광주교대 음악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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