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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만덕산을 수 놓은 다산과 혜장의 우정
작성일
2006-08-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127

만덕산을 수 놓은 다산과 혜장의 우정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800여 미터의 산길은 18세기, 경학과 불교의 두 석학을 대표하는 다산 정약용과 아암兒庵 혜장선사라는 별들의 만남이었다. 더불어 아암을 통한 다산의 다도에 대한 경도는 유배 생활의 신산함을 씻고 백성을 위한 실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후일 다성茶聖으로 일컫는 초의선사를 통해서 수준 높은 한국의 차 문화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태풍 ‘에위니아’가 한반도를 북상하며 소멸한 뒤 시작된 장마가 중부지방으로 엄청난 호우를 퍼부을 때, 발길은 먹구름이 잔뜩 드리운 전남 강진 땅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는 ‘남도 답사 일 번지’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붙어있을 정도로 너무나 유명해진 땅에 들어선 것이다. 다산초당 초입에 다다랐을 때는 오후 두 시 가까울 무렵, 비가 한두 방울씩 돋기 시작한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면서 어느새 세월을 되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200여 년 전 이곳에도 이맘때면 비가 내렸고 다산 역시 비를 맞았겠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산초당의 초입에 다다르자 흐린 날씨에도 의외로 많은 인파가 북적거려 필자를 현재로 되돌렸다. 입구에는 번듯한 찻집과 번잡한 먹거리 장터가 아마도 저승에 계신 다산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라는 상념을 품게 했다.

명부전에서 내려다 본 백련사
<명부전에서 내려다 본 백련사>
다산초당은 유배 생활 18년 중 11년을 보낸 곳으로 본채인 초당草堂과 동암東庵, 서암西庵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당은 전후와 좌우에 마루를 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집이다. 본래의 초당은 1930년대에 무너져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1957년에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초당 우측 편으로 ‘관어재觀魚齋’가 있고 그 옆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계곡물을 끌어와 작은 폭포를 만들고 연못을 채워 고기를 놀게 하여 유배의 시름을 달래며 바라보았을 다산의 심상을 그려보았다. 초당 주변엔 찻물을 길었을 샘이 있고 솔방울로 차를 끓인 다조로 쓰인 정석바위가 눈에 띈다. 다산이 자신의 가슴에 쪼아 넣듯 새겼을 해서체의 정석丁石이라는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다. 연못 우측에 세워진 동암은 조선후기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곳으로 다산의 역작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의 산실일 것이다. 동암에는 다산의 친필을 집자하여 모각한 ‘다산동암茶山東菴’이라는 현판과 함께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바로 추사 김정희가 다산의 제자인 김학래에게 써 준 글을 집자해서 현판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보寶라는 글씨는 자세히 보면 갓머리 변 밑의 우측에 부缶 대신에 보배진珍이 들어가 있어 완당의 파격을 엿볼 수 있다. 서암은 다산이 제자를 가르쳤던 곳이다. 동암을 지나 우측 옆으로 오르면 탐진강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언덕 위에 자그마한 누각이 나타난다. 바로 천일각天一閣이다. 원래는 없었던 것인데 강진군에서 세운 것이다. 강진만이 보이는 이곳은 흑산도로 유배된 형,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다산이 자주 서있던 곳으로 동기에 대한 깊은 정이 가슴에 와 닿았다. 아마도 초당시절 무렵에는 세상사의 무상함과 더불어 주역을 통해 은자로서, 자신의 운명을 전체적으로 조응하고 조용히, 그러나 반듯하게 처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현실을 직시하여 일반 백성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 긍휼함을 잃지 않고 그들을 위한 개혁적인 세상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연구하였던 것이다. 법화사상의 천년도량 백련사와 아암兒庵 혜장 천일각을 나와 다산초당의 위쪽으로 산길이 시작되는데 바로 이 길을 따라 8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백련사가 위치해 있다.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사로 통일신라 때인 839년에 무염선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그러나 백련사가 한국 불교사에서 유명해진 이유는 고려 후기인 1211년(희종 7년) 원묘국사 요세가 주도하여 일어난 불교 개혁 운동인 백련결사가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백련사는 아암 혜장스님과 다산의 향기 짙은 교우가 시작된 곳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천주교를 배교하고 한반도 끝자락인 강진까지 유배와서 뼈아픈 낙담과 실의에 젖었던 다산에게 의암 혜장 스님과의 만남은 일상의 유일한 낙이자 희망이었을 지도 모른다. 10살 손아래였던 혜장은 다산을 만나자마자 다산의 학식과 인품에 깊이 매료되었고 다산 역시 혜장에게서 불교와 함께 진정한 차 문화에 경도되었던 것이다. 백련사로 향하는 산책로는 죽책이 양옆으로 설치되었을 뿐 길은 아마도 다산과 혜암이 서로 토론과 우정을 함께 나누며 걸었을 옛길 그대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백련사에 다다를 무렵 만덕산의 여기저기에는 자생하는 야생차가 눈에 띄었다. 또한, 백련사 주위의 경사지에는 천연기념물 151호로 등재된 약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 숲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비에 젖은 동백나무 잎은 초록빛 그늘을 더욱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동백림을 빠져나와 백련사 경내로 들어섰다. 대웅전을 향하는 만경루 입구에는 주지인 혜일慧日스님이 관람객을 위해 열었다는 선다원禪茶苑이 있어 역시 이곳이 해남 대흥사와 더불어 전통차 문화의 본산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백련사 대웅보전의 현판은 만경루의 현판과 함께 18세기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가 남긴 글씨로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듯 필획은 에너지 넘치며 살아있었다. 그 역시 전남 완도 근처의 신지도에서 16년간이나 유배 생활을 겪었다. 대웅전은 앞면 세 칸, 옆 면 세 칸의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이루어진 다포식 건축물이다. 대웅전 오른편에는 보물 제1396호인 백련사사적비가 고풍스러운 자태를 보인다. 높이 447Cm 규모로 용머리를 한 귀부는 고려시대에 조성되었고, 비신과 이수는 훼손되었던 탓인지 1681년(숙종 7년)에 조성되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얼마 전에 조성된 듯한 사적비 하나가 한 쌍으로 나란히 서 있다. 만경루에 오르니 멀리 강진만이 굽어다 보이는 구강포 앞바다 전경은 압권이었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 안양루에 올라 멀리까지 중첩된 산과 그림 같은 능선이 펼쳐진 전경을 바라볼 때 가슴에 차올랐던 벅찬 감동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백련이라 이름난 절 아름답고, 만덕산은 맑기만 한데, 문은 고요히 솔 그림자로 닫혀 있어, 객이 오면 풍경 소리만 듣네. 돛단배 바다 위로 지나고, 새들은 꽃 사이를 날며 우짖으니, 오래 앉으면 되돌아갈 길조차 잊을 만큼, 인간세상의 흔적은 하나도 없네!” 고려 시대 혜일 선사 역시 같은 감동을 읊었던 것이다. 다산 유배 당시 백련사의 지주였던 혜장은 갓 34세였다. 후일 불자로서 도에 이르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과음으로 입적하게 된 그의 한과 당시 부패한 탐관오리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을 안타까워하던 다산의 연민이 하나가 되어 아직도 만덕산 봉우리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백련사를 내려오는 길엔 굵어진 빗방울이 더욱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좌. 백련사로 향하는 산책로 우. 백대웅보전 현판
<좌. 백련사로 향하는 산책로 우. 백대웅보전 현판>
다산초당과 백련사 찾아가기 버 스 : 강진읍에서 귤동행 군내버스 이용(하루9회, 25분 소요) 자가용 : 해남방면 18번 국도 → 2㎞ → 강진읍 추도3거리(좌회전) →완도방면 군도 2호선 → 7㎞ → 다산초당 유경아 _ 한국예술종학학교 전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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