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도쿄땅 보다 먼저 달렸던 경성 전차
- 작성일
- 2023-10-31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231
‘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구보는 잠깐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기와 더불어 그곳에 있던 온갖 사람들이 모두 저 차에 오른다 보았을 때, 그는 저 혼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닯음을 맛본다. 구보는, 움직이는 전차에 뛰어올랐다.’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속에는 경성의 전차와 경성 전차의 노선이 담겨져 당시 전차는 경성의 이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그 당시 전차의 존재는 일본보다 근대화에 앞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경성전차는 1899년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도쿄 시내보다 4년이나 앞서 운행했다. 물론 일본에서는 서울보다 먼저 교토(1895년)와 나고야(1898년) 전차를 개통했다. 하지만 도쿄는 우리나라보다 4년 늦게 운행을 개시했기에 일본에서 온 군인이나 관리에게도 전차는 매우 낯선 신식 문물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근대 과학 문명의 핵심인 전기와 전차의 도입만 보면 일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전차의 노선은 서대문에서 종로와 동대문을 거쳐 홍릉까지 홍릉선으로 연결됐다. 청량리 인근 홍릉에는 명성황후의 묘가 있었는데 노면 전차 부설의 목적에 근대 교통수단 도입은 물론이고 고종의 홍릉 참배에 편의를 제공하려는 의도도 담겼다. 그다음으로 연결된 노선은 서대문 기점이다. 서대문 정거장은 경인선으로 열차의 출발지이며 종착지였다.
전차는 단순히 탈것의 의미를 뛰어넘어, 경성의 주민들에게 새로운 일상을 구성하게 하는 친숙한 대상이 됐다. 어디를 가기 위해 전차를 탄다기보다, 전차를 타야만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된 셈이다. 그 당시 전차는 지금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시돼 있다. 오래전 운행을 멈춘 전차 381호로, 국가등록문화재이다. 지금은 전시장에서나 만날 수 있는 문물이 되었으나, 근대를 거쳐 현대로 진입하는 많은 순간을 목격해 온 교통수단이자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꾸고, 근대화를 이끈 산물이다.
글. 편집실 참고 자료. “철도깨비”, “쇠당나귀”…경성 전차, 도쿄보다 4년 먼저 달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박태원, 조선중앙일보, 1934.8.1.~9.19),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전차’ 전시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