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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민족의관의 자존심을 엮는 갓일 장 정춘모
작성일
2006-08-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438

민족의관의 자존심을 엮는 갓일 장 정춘모

“8,9개월 하나 엮고 나면 시력을 버리고,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 진사립의 좋은 점을 물었다. “벌써 광택부터 다르지, 늘 새것같이 반들반들해. 오래가지. 멋있지.” 하지만 이어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누가 이제 진사립을 만들겠어. 나 죽으면 진사립도 끝나는 거야.”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로부터 갓은 한국의 줏대와 체면을 상징했다. 그 중에서 통영갓은 단연 으뜸으로, 철저한 전통방식의 공정과 제품의 우수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이제는 촌로에게서도 볼 수 없고 사극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만 간간이 볼 수 있는 갓, 우리 주위에서 멀어져 버린 전통 갓을 오늘도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이가 있다. 갓에 미치기까지

삼성동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만난 정춘모鄭春模(67) 선생의 첫인상은 갓일(중요무형문화재 제4호)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다는 느낌이었다. “저요, 전 갓일 안 해도 먹고 살만해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제가 안 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고 마는 거지.” 갓일은 그에게 운명이었나 보다. 통영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춘모 선생이 스무 살 무렵, 유학을 간 대구의 하숙집에서 여러 어르신의 갓일 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첫눈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당시 대구는 전국 모든 농수산물의 집산지이자 최대 유통단지였고 갓 역시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팔려나갔던 때였다. 그리고 하숙집에서 갓을 만들던 이들 역시 당대 최고의 기능을 보유한 어른들이었던 것이다. 갓일은 크게 세 가지 공정으로 이루어진다. 대를 쪼개어 머리카락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얇은 대나무실로 다듬은 다음, 대올 4가닥으로 갓의 차양을 만드는 양태, 말총이나 소털로 관을 만드는 총모자, 그리고 양태와 총모자를 취합하여 최종적인 갓을 만들어내는 입자. 당시 정춘모는 양태장 모만환, 총모자장 고재구, 입자장 전덕기, 김봉주 등 당대 최고의 갓일 장匠들에게 갓일의 모든 기술을 전수받았던 것이다. 그들 모두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갓은 이미 사양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한 분, 한 분씩 세상을 뜨고 말았다. 헌데 그분들의 자제들은 모두 갓일과는 무관한 길을 걸어갔다. 이에 전통 갓일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정춘모 선생은 그때부터 더욱 완벽한 갓을 만들기에 고군분투하게 된다. “한 마디로 갓에 미쳤던 거지.” 진사립의 위기 <한코 떠라 두코 떠라 세코 떠라 속히 떠라 토양하나 돌아 갈제 쌍금 쌍금 쌍가락지 호작신을 닦아내어 먼데보니 달이 뜨니 후에 보니 처자로다 처녀애기 자는 방에 숨소리가 둘이로세 천도복숭 울오랍시 거짓말슴 말아주소 꾀꼬리라 그림방에 참새같이 내누었네 동남풍이 불어 풍지떠는 소리로다 거짓말슴 말아주소.> 예전에 갓일을 하던 이들이 부르던 노동요다. 양태 작업 24단계, 총모자 17단계, 입자에 10단계 등 총 51단계를 거쳐야만 갓이 하나 탄생되기에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야 하며 엄청난 인내심을 가져야 가능한 고단한 작업이다. 이제 내일모레면 칠십 줄을 바라보는 나이이기에 전수생을 양성하고 있긴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그다지 낙관적이지는 않다. “단순한 기능 공정밖에는 가르칠 수 없어요.”, “제대로 된 진사립 하나 만들려면 신명을 바쳐야 하는데, 요즘 누가 그걸 하겠습니까.” 진사립眞絲笠. 그렇다 정춘모 선생의 자부심은 바로 진사립에 있었던 것이다. 80년대 초 정부 고위인사의 부탁으로 만들었다는 진사립, 그것은 갓일 장匠 최대의 숙원이었다. 전수관 내에도 물건을 볼 수가 없고 다만 선생이 내민 사진 속으로만 그 실체를 봉사 코끼리 만지듯 어림짐작해 볼 따름이었다. 진사립은 양태를 명주 세사로 엮는다고 했다. 그렇기에 죽사竹紗에 비해 오랜 시간과 고도의 하이테크를 요구한다. “8,9개월 하나 엮고 나면 시력을 버리고,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 진사립의 좋은 점을 물었다. “벌써 광택부터 다르지, 늘 새것같이 반들반들해. 오래가지. 멋있지.” 하지만 이어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누가 이제 진사립을 만들겠어. 나 죽으면 진사립도 끝나는 거야.”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국에 실크햇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갓이 있었다 갓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남 용강군 화상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고분인 합신총 벽화의 기사인들이 쓰고 있는 입자笠子는 조선시대의 매월당이라고 부르던 입자와 모양이 일치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서민들의 관모로 소립素笠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전성기는 조선조 중엽, 통영 12공방 중 하나였던 갓방에서 질 좋은 갓이 생산되면서부터이다. 갓은 당시 모양에 따라 신분을 나타내기도 했고, 또 색깔에 따라 쓰임이 다르기도 했다. 예를 들면 홍립은 무관이 쓰던 갓이었고, 국상이 나거나 부모가 돌아가시면 백립을 썼던 것이다. 갓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유행을 달리했다. 연산군 때에는 양태가 넓어지고 대우(관)가 너무 높아져 왕이 승정원에 교지를 내려 규격의 표준을 제정한 일도 있었다. 명종 때는 대우가 낮아지고 양태가 넓어져 대우는 식기를 엎어놓은 것 같고 양태는 우산을 펼친 것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되자 명종은 다시 새로운 갓을 제정했는데 대우는 너무 높고 양태는 너무 좁아 보는 사람마다 웃음을 자아냈다고 한다. 고종 무렵에는 제립자유화 정책에 따라 갓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여 모든 계층이 갓을 쓰게 되었고 대원군은 양태를 좁게 한 소갓으로 개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흰 두루마기에 검은 갓. 갓을 쓴다는 것은 의관을 정제할 때의 마무리다. 그러한 선비의 품격을 나타내던 갓은 이제 한낱 시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갓은 정녕 사라질 것인가 전수관 한쪽 벽에는 그에게 갓일을 가르친 선생들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고, 그 옆에는 미국 스미소니언 학회로부터 받은 전통공예 인증서가 걸려있다. 그리고 천정으로 삼십여 개의 노란 갓집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앞으로 그 갓집을 채울 갓은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인가. 제도적 뒷받침 없이 자생적으로 만들고 배워야 할 작금의 장인 전수생 풍토에서 과연 누가 갓일을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의 몫이리라. 오늘날 IT 분야에서의 한국인의 놀라운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갓일과 같이 오랜 세월 축적된 우리만의 고도의 하이테크가 그러한 능력을 낳은 것은 아닐까. 누구나 우리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보존해 나가길 열망할 때, 결코 우리의 전통 갓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한평생 갓에 미쳐 살아갈 또 한 명의 정춘모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으리라. 글 _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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