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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민과 함께 하는 문화유산 e-야기 - 서울의 별천지, 백석동천 유적
작성일
2006-02-0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407

[국민과 함께 하는 문화유산 e-야기]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문화재에 얽힌 재미있는 숨은 이야기, 문화재 이해의 체크포인트, 문화재 지정 보수 수리 등 행정프로세스 상의 노하우 등 살아있는 문화유산이야기들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로서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미로라고 여겨지는 강북의 경우에도 사대문안은 의미와 상징이 복합된 고도의 계획지구입니다.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구역을 동서남북으로 구획하여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고, 경제와 정치지구, 생활지구, 종교지구 등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청계천이 도심의 휴식공간으로 정비되면서 그 풍수적 의미가 보다 쉽게 드러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산과 하천, 궁궐과 건물들로 서울을 설명하게 되는데, 서울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문화유산으로 종로구 부암동의 백석동천 유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작년 9월 개방이 결정된 숙정문이 위치하고 있는 백악白岳 (현재의 이름은 북악산입니다만 문화유산으로서의 의미를 살린다는 뜻에서 이 원고에서는 원래 이름에 따라 백악이라고 하고자 합니다)의 서쪽 어깨에 놓여진 문이 창의문(자하문)으로, 백악의 능선을 따라 조성된 서울성곽의 남쪽은 성안이 되고 북쪽은 성밖에 되는데, 부암동은 자하문 밖, 백악의 뒷자락에 해당됩니다.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는 이 일대는 아직도 군사보호구역이 일부 남아있으며, 대통령님과 영부인의 산책로가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한 작년 인기드라마였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촬영현장도 부암동이었다고 하니 정감어린 주거지로서의 면모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하터널을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 뒷길로 다닥다닥 붙은 주택사이를 지나 올라갑니다. 하류는 안타깝게도 복개되어 있습니다만, 계곡의 너럭바위에 걸치듯이 집들이 들어서 있고 올라갈수록 건물은 줄어들고 도롱뇽이 산다는 계곡과 우거진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서울 가까운 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이 곳은 앵두나무가 많다고 해서 앵두나무골이라고도 하고, 한적하니 뒷골이라고도 하고, 백사실이라는 이름으로도 통합니다. ‘백사실’이라는 이름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에서 유래한다고들 하는데, 가까이 인왕산 아래 필운대에 살았던 백사선생이 왕래했을 가능성은 있겠지만 직접 집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백석동천 유적은 마을을 벗어나 한 구비 돌아선 곳에 위치한 건물지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백사실의 계곡물을 끌어들일 수 있게 연못을 하나 만든 다음, 한 쪽에 작은 육각정자를 세웠으며, 정자 반대편으로 높은 지대에 연못과 정자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높은 기둥을 가진 사랑채를 짓고, 그 뒤편에 널찍한 안채를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조경적 배치는 조선조 별장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서울의 별장으로는 성북동의 성낙원城樂園을 제외하면 이 곳 부암동 일대에 남아있는 것들을 꼽을 수 있으며, 대원군의 별장으로 유명한 석파정石坡亭(원래는 김흥근의 별장입니다), 안평대군의 무계정사武溪精舍, 윤치호의 부암정傅巖亭 등이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둘러볼 만 합니다. 주초석과 담장석, 연못의 축대, 계단과 같은 석재가 많이 남아있고 계곡과 연결되는 곳은 두 장의 간결한 석재를 놓아 다리로 삼고 있으나 목부재나 특기할만한 유물은 아직 발견된 바 없습니다. 앞으로 연못 등을 발굴조사하면 보다 많은 내용이 확인될 것입니다. 문화유산의 보존이라는 면에서 보면 ‘의미의 커넥션’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조선왕조 600년 고도 서울은 서울성곽으로 구분지어진 성내 지역에 한정하여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고 청와대 뒤편에 있는 백악에 접근할 수 없다보니 서울의 지형적 상징성도 일부 결실된 형태로밖에 해석이 불가능한 실정이었습니다.

숙정문 일대가 개방되면 누구든지 백악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에서 굽이쳐 오는 산맥을 짚어보고, 남으로는 서울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역사도시 서울을 감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창의문으로 나서면 1800년대의 별장들을 통해 우리 민족의 풍류를 되새김하고, 버들치와 가재가 서식하는 자연 계곡을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곡과 건물지를 지나 100여 미터를 더 올라가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습니다. 백악의 뒤편이니 ‘백석白石’이라 하였고, 예로부터 신선들이 사는 곳을 ‘동천洞天’이라고 해 왔다고 하니 이 글귀는 종로구 부암동의 아름다운 경치와 이를 즐기는 문화를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이라 하겠습니다. 이 일대를 읊은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조 문인 이광려(1720~1783)의 문집, 『이참봉집』의 일부를 전합니다. 이종희 _ 문화재청 문화재정책과 사무관 春臺水石自年年 춘대*의 물과 바위는 스스로 해마다 있었지만 始見溪山有別天 이제 비로소 산 계곡에 별천지가 있는 것을 보았네 探到東源高瀑處 물어물어 동쪽 근원 높은 폭포 흐르는 곳에 이르니 山丹花發許亭前 허씨의 정자**앞에는 산단화가 만발하였네 *인근 탕춘대(蕩春臺)를 말한다. 『동국여지비고』에 탕춘대는 창의문 밖 삼각과 백운 사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세검정 동쪽의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있다. **허씨의 모정(茅亭)에는 간정료(看鼎寮)라는 편액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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