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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별기획 문화유산 다시보기(안동편)
작성일
2006-02-0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689

안동은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종가가 문화재이고 조상들의 문집이 문화재이며, 하회별신굿탈놀이가 문화재이다.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는 문화재들이다 안동 하면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너른 마당에 자리한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평화롭게 담장 너머 세상 구경을 하고, 낡았지만 위엄이 넘치는 한옥 마루에 앉은 할아버지의 카랑카랑한 기침소리가 한적한 마당에 울릴 때, 몇 백 년은 그 자리에 있었을 가마솥에서는 은은하게 고향의 냄새가 피어난다. 양반의 고장이자, 종가의 고장으로 알려진 안동은 그렇게 평화로와 보이면서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위엄과 품위가 함께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또한 안동은 문화재의 고장이다. 문화재의 고장이라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정부에서 지정한 문화재가 전국 그 어느 지역보다 두드러지게 많다. 시군이 통합되기 전에는 안동군이 경주시보다 더 많은 지정문화재를 보유하여 전국 1위를 자랑하기도 했다. 지정문화재가 양적으로만 많은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양한 문화재가 즐비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경주의 문화가 주로 불교문화재와 왕실문화재 중심이어서 화려하긴 하지만 실제 우리의 생활과 동떨어진 ‘과거’의 문화라면, 안동의 문화는 불교문화재 외에 유교문화재, 민속문화재 등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현재’의 문화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안동에서는 경주에서처럼 화려한 문화재가 눈에 띄지 않는다.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종가가 문화재이고, 조상들의 문집이 문화재이며, 하회별신굿탈놀이가 문화재이다. 모두 지금까지 생명력을 가지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문화재들이다. 이처럼 안동의 문화재는 과거의 전통문화이자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이다. 그러므로 문화재의 고장이라는 말은 곧 전통문화의 고장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현재 안동에서는 500여 개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모두 조상의 삶과 우리의 삶이 녹아 있는 소중한 것들이지만, 지면에 모두 소개할 수는 없기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눈여겨 볼 만한 곳을 소개한다.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에 대한 염원을 담은 이천동 미륵불(제비원 석불, 보물 제115호)

안동지역의 전통가옥 까치구멍집(시도민속자료 69호)
<안동지역의 전통가옥 까치구멍집(시도민속자료 69호)>
안동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를 따라 5km쯤 가면 오른쪽 가파른 언덕 위에 조그마한 암자 연미사燕尾寺가 있다. 이 연미사에는 제비원 석불이라 불리는 석불이 있는데, 제비원이란 명칭에서 원院이란 바로 국가에서 인정한 여관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사찰의 숙식시설을 국가에서 원院으로 지정하여 활용했다고 하니, 제비원의 명칭이 가진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제비원 석불은 거대한 바위 한 토막을 잘라 내고 그 사이 암벽에 마애불을 새긴 것으로 높이가 12.4m나 되는데, 몸체만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새기고 머리는 다른 돌로 조각하여 얹어 놓은 것이다. 몸체를 이루는 자연암석도 위압적이지만 입을 꽉 다물고 눈에 힘을 잔뜩 준 모습이 매우 힘차고 위엄 있게 보인다. 이런 인상적인 석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쯤 없을 리 없다. 이 제비원 석불 역시 사연을 품고 있다. 옛날 제비원에 연燕이란 처녀가 있었단다. 연이는 인물 곱고 마음씨 착하며 불심도 깊었다. 한편 이웃 마을에는 김씨 부자父子가 살았는데 그들은 부유하였지만 인색하여 남을 도울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들이 갑자기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다. 염라대왕은 “네 죄가 많아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날 것이로되, 건너 마을 연이가 쌓아놓은 선행善行의 창고가 가득하니 좀 빌려 쓰면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저승에서 연이의 선행 재물 덕에 살아나 이승으로 돌아온 그 아들은 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기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갑자기 큰 재물을 얻은 연이는 이를 모두 부처를 위하여 쓰기로 하고 법당을 지었다. 5년이나 지나 법당의 완공을 앞둔 바로 전 날, 와공瓦工이 그만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바람에 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의 혼은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절을 제비사 또는 연미사라고 부르고 이 일대를 제비원 또는 연미원이라고 한다. 연이는 서른여덟 살 되던 해 동짓달 스무이튿날 죽었는데 그날 저녁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큰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석불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공덕을 쌓은 연이가 부처로 태어났다고 믿어 이 부처를 미륵불로 알고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제비원 석불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제비원 미륵불의 머리 부분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조선시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라 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미륵불의 머리 부분을 칼로 쳐서 떨어뜨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이여송은 전란이 평정되자 조선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훌륭한 인물이 날만한 지혈地穴을 찾아 지맥地脈을 끊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제비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말이 우뚝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이여송이 사방을 둘러보니 제비원에 큰 미륵불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미륵불의 조화 때문에 말이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한 이여송은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미륵의 목을 쳐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자 말발굽이 떨어져 길을 갈 수 있었다. 지금도 미륵불의 목 부분에는 당시 칼로 베일 때 가슴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의 자국이 있다. 이여송에 의해 떨어진 목은 오래도록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떨어진 목을 제자리에 갖다 붙이고, 횟가루로 붙인 부분을 바르면서 염주 모양으로 불룩불룩하게 다듬어 놓았다. 그래서 머리와 목을 이은 자리를 보면 마치 염주를 목에 걸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제비원은 또한 성주의 본향으로 여겨진다. ‘성주나 본本이 어드메냐 / 경상도 안동땅의 제비나원이 본일넨데 / 제비원이다…’ - 해주 지역 ‘성주굿’ 부분 ‘성주 본향 본을 풀면 게 어디가 본이신고 / 안동주 천제비원에 할나산이 보이신가 / 할나산에 들으스니 대부동이 서 있난데…’ - 서울 지역 ‘황제풀이’ 부분 ‘성주로다 성주로다 성주 근본이 어디멘고 / 경상도 안동땅에 제비원에 파른 솔씨는/ 물안에 던졌더니 그 솔이 점점 자라나야…’ - 목포 지역 ‘성주굿‘ 부분 ‘성주 근본이 게 워딘가 /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의 솔씨받아’ - 광양 지역 씨끔굿 ‘성주’ 부분 전국의 성주풀이에 제비원이 본향으로 등장한다. 성주라는 것은 민간신앙에서 집집마다 그 집의 부귀영화와 평안을 지켜주는 신을 말하는데, 그러한 신의 근본지로 여겨졌다는 것은 민간신앙의 기원지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종교문화의 근간을 이룬 무교는 삼국시대 이후 불교와 끊임없는 접촉을 통하여 융합되어 왔다. 무당을 보살이라 칭하고 사찰에 산신각, 칠성각 등이 있는 것은 이것을 말해 주는 증표다. 또한 불교적 측면에서도 미륵불로 형상화되어 있는 제비원의 의미는 가치가 있다. 신앙의 대상으로 부처가 대두하게 되고, 현세 이후 다가올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로서 미륵신앙이 민중들 사이에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되면서, 사람들이 불교적 메시아로서 미륵을 찾게 되는 것이다. 미륵이 오게 될 미래의 세상은 물질이 지극히 풍족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답고, 누구나 질병으로 고생하는 일 없이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이상향으로 약속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불법에 귀의한 신자들이 누구를 막론하고 미륵의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미륵불은 민간의 신앙대상으로 존재해 왔고 관련한 전설들도 민중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식 문화재 명칭인 이천동 석불상보다는 제비원 미륵불이라는 명칭이 더 알려져 있다. 이는 아마도 사랑과 삶의 내용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 제비원이라는 명칭에 더욱 애정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까치구멍으로 통하는 세상

태사묘 (경상북도 기념물 제15호)
<태사묘 (경상북도 기념물 제15호)>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있는 까치구멍집은 안동지역의 다른 까치구멍집과는 다르게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다. 남평 문씨의 종가인 이 집은 약 300년 전에 지은 건물로 안동지방의 전형적인 평면구성을 취하고 있다. 원래 임동면 마령동에 있던 것을 1988년 임하댐 건설로 옮긴 것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중앙 앞쪽에 흙바닥을 그대로 둔 봉당이 있고 그 뒤에 마루가 놓여 있다. 마루 왼쪽에 안방, 오른쪽에 상방이 있고, 봉당의 왼쪽에는 부엌, 오른쪽에는 외양간과 그 위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벽은 온돌방만 흙으로 하고, 나머지는 널판으로 되어 있다. 까치구멍이 있다 하여 까치구멍집이라 불리는 집들의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희귀하게도 기와로 지붕을 얹었다는 점에서 중요시 되는 집이다. 지금의 위치로 옮기기 전에는 건물 외부에 몇 개의 부속건물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중산층의 주거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까치구멍집은 안동지방 특유의 집 형태로, 겹집은 집 안에서 모든 취사와 난방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창문도 없고 출입문은 하나뿐이라 연기가 집안에 가득 차면 빼내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집 안의 연기를 빼고 빛을 들이기 위해 지붕 용마루의 양쪽 끝에 구멍을 내서 이엉을 얻는다. 이때 연기는 빠져나가되 빗물은 들지 않도록 구멍의 형태나 벌어진 각도 등 매우 세심하게 배려해서 만드는데, 그 구멍이 마치 까치집의 구멍 같다 해서 까치구멍집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까치구멍집의 공간 구성은 ‘ㅁ’ 자형의 겹집 안에 봉당, 부엌, 외양간, 대청, 안방, 건넌방(사랑방) 등 모든 주거공간이 모여 있는 폐쇄적 가옥이다. 즉 대문을 닫으면 외적의 침입이나 맹수의 공격을 막을 수 있고 추위를 견디어 낼 수 있으며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혀도 집안에서 모든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든 구조이다. 경상도 북부지방과 강원도 태백산 등지에는 겨울이 너무 추워서 소나 돼지 등 가축을 집 밖에 두면 얼어 죽을 염려도 있고 관리하기에도 힘이 든다. 그래서 외양간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집 안에 설치하고, 겨울에는 문을 닫아 찬바람을 막고 집 안에서 지내는데, 취사나 난방을 위해 불을 피울 때 나는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구멍을 내 놓은 것이다. 까치구멍집에서의 생활모습을 보면 부엌에서 밥을 짓고 외양간에서는 소를 기르며 방과 마루에서는 밥 먹고 잠을 자고 봉당에서는 화덕(불씨)을 피워 두며 저녁에는 관솔을 피워 집 안을 밝힌다. 이러한 모든 생활이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니 자연히 공기가 탁해지게 되고, 이를 배출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만든 것이 까치구멍인 것이다. 독특한 주거형태인 까치구멍집들은 대개 초가집으로 되어 있으며, 기와집으로 된 까치구멍집은 매우 드물다.

고려 초기부터 충신의 본향으로 안동시 구 시가지의 중심인 북동문 거리에 태사묘太師廟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하여 태사로 추대된 세 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바로 이 태사묘인데, 고색창연한 옛 건물들이 즐비하여 위엄이 물씬 풍긴다. 태사太師란 고려의 삼사 중의 하나로,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를 말한다. 이들은 삼공三公인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과 함께 임금의 고문 또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으로 실무에는 종사하지 않았으며 품격은 정1품이다. 권력의 중심이 지방호족들로 재편되던 신라 하대에 가장 강성했던 세력은 후백제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견훤이었고, 뒤에 일어난 왕건은 견훤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초기에 왕건은 견훤을 꺾을 만큼 세력이 강하지 못했고, 더구나 인접한 상주고을이 견훤의 출신지여서 개성에 기반을 둔 왕건으로서는 매우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안동은 경주와 소백산맥 북쪽을 잇는 연결점이었고, 이 지역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후삼국의 판도가 갈릴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 호족세력의 중심이었던 김선평金宣平, 권행權行, 장길張吉 세 사람이 왕건의 편을 들어 병산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니 왕건이 얼마나 감격했을는지 짐작이 갈 만하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을 태사로 추대하고 이 곳의 고을이름을 ‘동쪽을 안정시켰다’는 뜻으로 안동安東이라고 하면서 원래 군郡이던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그 중 권행은 본래 김씨였는데 왕건이 “권도를 적절히 행했다.”는 치사와 함께 권씨 성을 내렸고, 오늘날 안동의 명문사족名門士族으로 자리 잡은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태사묘는 삼태사가 돌아가신 후에 그 공적을 기려 묘우廟宇를 세운 것을 시초로 하여 여러 번 중수되어 왔고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가운데 담을 경계로 하여 왼쪽에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서원 형식을 따른 전학후묘의 구조로 이루어져 강당 뒤에 사당이 위치해 있고, 오른쪽에는 김•권•장 세 성씨의 화수회花樹會사무실과 유물각이 있다. 오늘날까지 설, 단오, 추석 등 명절에는 헌관과 집사가 향화를 올리게 되고 해마다 음력 2, 8월의 중정中丁일에 제향을 받들고 있다. 보물각에는 권태사의 유물-영가지永嘉誌 기록記錄-이라고 전하는 여지금대, 옥피리, 주홍목배가 있고 홍건적 난리를 피하여 공민왕이 복주에 왔다가 하사한 백옥대, 옥관자, 은식기, 은수저, 흰꽃비단 4폭, 초록단 2폭, 금선단 3폭, 붉은 금선단 1폭, 왜색 화문단 1폭, 붉은 명주 1폭, 청•황•적•백 각색 화문단 각 1폭, 향주머니 7개, 여지금대, 모란금대, 오서대, 상아홀 각 1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보물 제451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유물 가운데는 전자篆字로 새겨진 철 도장과 부인용으로 보이는 예쁜 가죽신도 있는데, 이처럼 태사묘에 아낙네의 물건이 있는 것은 아마도 왕후였던 노국공주의 유물이 아닐까 추측된다. 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어서 좀 아쉽지만 오래된 유물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불가피할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안동은 오랜 세월 학문과 권력의 근거지로서 대학자나 세도가들을 무수히 배출하면서 나름대로 품위 있고 절제된 문화를 형성해 왔으며, 21세기를 맞은 지금까지도 다른 어느 지역보다 그 전통의 맥을 고장 전체가 이어나가고 있는 곳이다. 살아가면서 한 번은 꼭 찾아가 결코 화려하진 않지만 위엄이 느껴지는 우리 조상의 삶을,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만나 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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