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거문고와 한 몸같이 산 국악인생 - 금헌(琴軒) 신쾌동 (거문고산조)
- 작성일
- 2018-03-30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1878
1910년 전라북도 익산 삼기면 오룡리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신쾌동은 어려서부터 신동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능이 특출했다. 그런 그의 끼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소리를 잘하고 풍류를 즐기던 아버지 신선조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음악을 접했던 것이다.
신쾌동은 9세 때인 1921년 박생순(朴生順)에게 1년 동안 양금(洋琴) 풍류를 배웠고 12세 때인 1923년에는 박학순(朴學淳)에게서 가야고 풍류와 가야금 산조를 배웠다. 13세에서 15세까지는 박생순에게 단소와 대금을 익혔으며, 후에 단소명인 전용선에게 단소 풍류와 산조가락을 배웠다.
드디어 그는 15세에 이르러 정일동에게 거문고 풍류를 배우게 된다. 처음 거문고를 배울 당시에는 거문고의 진가를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거문고의 맛을 제대로 알고 난 뒤에는 거문고가락을 찾기 위해 40리 떨어진 이리의 율계(律契)를 찾아가 10여명의 회원과 함께 앉아 풍류합주를 한바탕 타고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아무리 먼 거리도 힘든지조차 모를 만큼 거문고라는 악기에 푹 빠졌던 것이다. 금헌(琴軒)이라는 호는 이 시기 율계 회원 중 하나였던 금치 선생이 지어주었다 한다.
신쾌동은 17세가 되던 1927년 김소례와 혼인을 했는데, 이 무렵 그의 부친은 충남 강경에 있는 거문고산조의 창시자 백낙준을 찾아가 아들에게 거문고산조를 가르쳐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로부터 4년간 신쾌동은 백낙준에게 밤낮없이 거문고산조를 익혔다.
백낙준 가락을 배운 후 고향 익산에서 산조에 전념하고 있을 때, 명창 임방울과 이화중선, 이중선의 권유로 부안의 줄포(茁浦) 가설무대에서 처음으로 거문고 산조를 연주했다. 그 뒤 목포극장에서 명창 이동백, 정정렬, 박녹주와 공연했다.
이후 1933년 서울로 본거지를 옮긴 그는 조선성악연구회에 들어가 활발하게 연주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이동백과 정정렬로부터 적벽가를 비롯한 여러 소리를 배웠는데, 그의 목구성이 워낙 좋아 이동백과 정정렬이 서로 신쾌동에게 소리를 가르치려 했을 정도였다. 이때 그들에게 배운 솜씨로 거문고병창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1953년 미국공보원에서 첫 독주회를 열었으며, 1959년 원각사에서 두 번째 독주회를 열어 큰 호평을 받았다. 광복 이후에는 최초로 열린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만인들에게 그의 재능을 알렸다. 제자 양성에도 열정적이었다. 박귀희, 김소희, 김월하 등 국악인들과 함께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 서울국악예술학교 재직 당시인 1964년 아시아음악학회 초청으로 미국의 30여 학교로 순회공연을 다니는 등 공연활동도 소홀하지 않았다. 1976년에는 ‘신쾌동류 거문고산조 보존 연수회’를 만들어, 신쾌동류 거문고산조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서도 힘썼다.
그러나 거문고산조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1967년 이후, 안타깝게도 담관암을 얻게 됐으며, 세 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완치되지 못하고 1977년 11월 22일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의 연주도 거절할 만큼 소신 강한 예술가였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문고의 거장 신쾌동. 그는 음악과 음악, 악기와 악기, 기악과 성악, 그리고 삶과 예술의 절묘한 융화를 통해 높은 경지의 음악세계를 이룩한 인물로 길이 남을 것이다.
글. 성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