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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역사 속 의복,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입었는가?
작성일
2017-04-0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8207

역사 속 의복,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입었는가? 신분의 높낮이를 상징하기도 하고, 몸을 보호하거나 맵시를 내는 데도 쓰였던 의복. 사극에서 친숙하게 보아온 전통 의복이지만 무늬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또 누가 입어야 하는 옷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전통 의복에 대한 소소한 물음을 풀어보고자 한다. 01.중요민속문화재 제58호 곤룡포 부 용문보(袞龍袍付龍紋補) ©문화재청

Q.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의복의 색상이나 디자인이 달랐나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제 사회에서 의복은 신분의 상하구분을 가장 쉽게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항상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의복을 흉내 내고자 했고, 이를 막고자 법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834년 신라 흥덕왕의 복식금제입니다. 여기에는 신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의복의 재료, 색상, 장식품 등이 상세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특히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복식금제가 자주 내려졌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관리의 공식 집무복인 관복의 색상과 재질, 흉배 등이 품계에 따라 구분되어 있습니다. 정1품에서 정3품까지는 붉은색 비단을, 종3품에서 6품까지는 푸른색, 7품에서 9품까지는 초록색을 사용하여 관복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일반복식의 경우에도 양반의 신분이 아닌 사람은 갓을 쓰지 못하게 하였고, 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포의 종류도 달라 도포는 양반만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

Q.조선시대 왕실 의복은 누가 만들었으며, 어떻게 제작되었나요?

왕실 의복을 만드는 곳으로 육조(六曹)의 하나인 공조(工曹)에 속한 상의원이 있었습니다. 상의원은 왕실 의복을 만드는 일과 함께 장신구와 보물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태조 때 만들어졌고 이후 고종 32년(1895)에 상의사(尙衣司)로, 광무 9년(1905)에 상방사(尙方司)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상의원에서는 직물제직, 염색, 의복제작, 가죽과 모피, 장신구, 금은 세공 등에 관련된 많은 장인이 왕실의 의복과 의대를 만들고 관리하였습니다. 그 수가 600여 명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왕실 의복은 모두 이와 같은 전문 장인들의 집단인 상의원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지금은 침선장, 염색장, 옥석장, 화혜장 등의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이러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조선시대 왕과 신하의 흉배는 어떻게 달랐나요?

흉배는 명칭처럼 왕, 왕세자, 문무백관이 착용하는 관복의 가슴과 등을 장식하는 일종의 표장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관복에 직접 수를 놓거나 직조를 통하여 장식하고 나중에는 따로 만들어 부착도 하였습니다. 특히 왕과 왕세자의 용포(龍袍)에는 용문(龍文)을 수놓은 원형의 흉배를 가슴과 등, 양쪽 어깨에 장식하였는데 이를 ‘보(補)’라고 합니다. 관리의 관복에는 네모난 모양의 흉배를 가슴과 등에 붙였습니다.

흉배는 그 문양에 따라 이를 착용한 사람의 상하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장식물이었습니다. 왕과 왕세자의 보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용이 수놓아져 있는데 용의 발톱 수에 따라 오조룡(五爪龍)·사조룡(四爪龍)·삼조룡(三爪龍)으로 구별하여, 왕과 왕비는 오조룡보, 왕세자와 세자빈은 사조룡보, 왕세손은 삼조룡보를 사용하였습니다. 단종 2년(1454)의 기록에 따르면 대군은 기린(麒麟), 도통사(都統使)는 사자, 왕자군(王子君)은 백택(白澤: 사자를 닮은 모습에 사람의 말을 하는 전설 속 동물), 대사헌은 해치(獬豸), 문관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雲鶴), 3품은 백한(白鷳: 흰 꿩), 무관 1·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비(熊羆)를 달도록 정했습니다. 영조 10년(1734)에 와서는 간편하게 문관 당상관은 운학흉배, 당하관은 백학흉배를 사용하게 하였다가 고종 8년(1871)에는 문관당상관은 쌍학(雙鶴), 당하관은 단학(單鶴), 무관 중에서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관은 단호(單虎)를 사용토록 하였습니다.

02.덕혜옹주 우이중(羽二重) 단속곳 ©국립고궁박물관 03.영친왕비 옥양목 적삼 ©국립고궁박물관

Q.예전 사람들은 어떤 속옷을 입었나요?

조선시대가 지금보다 오히려 더 다양한 속옷이 존재했습니다. 추운 겨울을 위한 방한용 속옷, 더운 여름을 고려한 속옷, 의복의 실루엣을 강조하기 위한 속옷 등 기능과 목적에 맞게 여러가지 속옷을 갖춰 입었습니다. 특히 여자의 속옷이 발달하였습니다. 남녀 모두 저고리 안에 속적삼을 착용하였고, 남자의 경우 바지 안에 잠방이라는 속바지를 입었습니다.

여성의 경우 제일 안쪽에 현대의 속옷과 비슷한 다리속곳을 입고, 그 위에 치마를 부풀리기 위해 여러 겹의 바지와 서양의 페티코트와 같은 역할을 하는 속치마를 착용했습니다. 먼저 바지통이굉장히 넓은 속속곳을 입고 그 위에 남자의 바지와 비슷한 형태의 고쟁이라고도 불리는 속바지를 입습니다. 고쟁이는 가랑이 아랫부분이 트여 있어서 용변을 보는 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여름에는 허리부분에 여러 개의 큰 구멍이 있는 살창고쟁이를 입어 조금이나마 더위를 잊고자 했습니다. 고쟁이 위에 속속곳과 같은 형태지만 바지통이 더 넓은 단속곳을 입습니다. 단속곳은 바지통이 치마만큼이나 넓어 속치마 대용으로도 사용했습니다. 예복을 착용하는 경우 치마를 더욱더 부풀리기 위하여 여러 겹의 치마가 달린 무지기 치마를 입고 그 위에 밑단을 한지로 만든 백비나 대나무살을 부착한 대슘치마를 입었습니다. 여성들의 경우 이처럼 많은 속옷을 여러 겹 입어 맵시를 만들었습니다.

Q.삼국시대나 고려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의 의복 고증은 어떻게 하나요?

영화나 드라마 등의 사극에서 등장인물이 입고 나오는 복식은 그 시대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시각 자료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극에서 복식의 고증은 정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에 비해 복식 고증을 위한 사료가 많지 않아 복식 유물, 도자기와 공예 작품 등에 표현되어 있는 인물의 형태, 그림, 문헌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고증합니다. 이렇게 형태고증이 이루어졌어도 이를 실제로 제작하는 데는 직물의 복원 등 또 다른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고증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제한된 예산에서 제작되는 사극의 경우 완벽히 표현해내기는 어렵습니다. 최근 퓨전사극의 경우 주제나 분위기에 따라 연출가와 의상 디자이너의 상상력이 더해지기도 합니다.

 

글‧조우현(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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