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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문화 탐방 - 동학농민전쟁의 격전지 황룡촌 답사기
작성일
2005-10-2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481

동학농민전쟁의 격전지 황룡촌을 가다




맑은 공기에 하늘까지 푸른 이 가을에 떠나는 여행에서 붉은 단풍이 빠질 수는 없겠다. 단풍이 아름다운 곳으로 강원도에 설악산이 있다면 전라도엔 내장산과 백암사가 그 제일이라 하겠다. 흔히 봄 백양, 가을 내장이라 하지만 붉은 단풍과 푸른 비자는 멋진 조화를 이룬다. 백양사가 있는 장성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동학농민전쟁의 격전지인 황룡촌이 있다. 장성읍내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제2황룡교를 지나 장산사거리에서 우회전한 다음 황룡중학교 앞에서 왼쪽 작은 길로 들어선 후 샛길을 따라가다보면 왼쪽에 높이 솟은 기념탑이 눈에 들어온다. 기념탑과 왼쪽 구석에 조그마한 검은색 비석이 전부이긴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 전인 1894년 음력 4월 그날엔 농민군과 경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이미 농민군은 지난 1894년 4월 7일 새벽 4시경에 황토재에서 4천여 명의 관군과 싸워 크게 이긴 바 있다. 이들은 곧장 전주성으로 향하지 않고 고부에서 정읍·흥덕·고창·무장·함평으로 이어지는 전라도 서남부지역을 잇따라 장악해가고 있었다. 정부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고, 장위영군 8백여 명을 파견하였다.

장위영군은 각 지역에 존재하던 관군과는 차원이 다른 부대로써 외국인 교관에 의해 훈련되고 최신 무기까지 갖춘 최정예부대였다. 이들이 전주에 도착한 날은 전주감영군이 황토재에서 농민군에게 패한 4월 7일이었다. 당시 상황을 전하는 초토사의 전보에 의하면 “병대兵隊는 출장가는 도중 수륙水陸의 피로로 인해 병에 걸려 있는 자가 적지 않았으며 전주에서 경성으로 도망간 자도 있어서 전역을 제대로 치를 수 있는 자는 겨우 5~6백 명에 그쳤다(「駐韓日本公使館記錄」 1, 12쪽)”고 한다. 다시 말하면 황토재 소식이 전해지자 2~3백 명이 도망쳐버려 5~6백 명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결국 홍계훈도 전의를 상실하고 정부에 추가 지원병과 물자를 요청하고, “우리 경군京軍이 동쪽으로 가면 그들은 서쪽으로 달아나고 경군이 서쪽으로 가면 그들은 동쪽으로 달아나므로 형세상 접전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민망스러울 뿐입니다”라는 전보를 보내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


   농민군은 4월 21일 함평을 출발하여 장성 황룡강 주변에 있는 월평장터에 진을 쳤다. 죽치고 앉아만 있을 수 없는 처지의 홍계훈도 금구·태인·정읍·고창을 거쳐 23일 장성에 도착하였다. 이제 조선의 최정예부대와 수탈과 억압에 못 이겨 떨쳐 일어난 민초들로 구성된 농민군과의 대격전이 눈앞에 이른 것이다.

   1992년 한여름 학생들과 함께 전라남북도에 걸친 동학농민전쟁 전적지를 도보로 돌아보면서 함평에서 장성까지 이어지는 24번 국도를 걸은 적이 있다. 어차피 두 곳을 이어주는 버스도 없으니 걸어야겠지만 도중에 트럭이나 봉고를 얻어 타는 일이 없도록 학생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당시 농민들의 마음이 되어보자는 취지였다. 40Km가 넘는 거리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해서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에 도착했다. 동네 어른들에게 물어물어 찾은 이학승비는 한마디로 너무 초라했다. 바로 옆 돼지우리에서 나는 악취도 그렇지만 풀숲에 가려져 쉽게 눈에 띄지도 않았다. 이끼가 낀 검은색 비석에는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라는 글씨만이 선명했다.






   4월 22일 홍계훈은 대관 이학승·원세록·오건영에게 병정 3백 명을 내주면서 농민군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들이 농민군을 만난 것은 다음날 23일 점심 무렵이었다. 마침 4천 명가량의 농민군은 월평장터와 황룡강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많은 숫자가 밥을 먹어야 하니 여기저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당연하고, 각자 가지고 있던 그릇에 밥을 받아 삼삼오오 둘러앉아 기름장에 찍어 먹는 식이었다. 강 건너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는 이학승과 경군의 눈에는 간단하고 쉬운 상대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이들은 접전하지 말고 동정만 살피고 오라는 홍계훈의 말을 무시하고 대포를 쏘아 농민군 4~50명을 쓰러뜨렸다. 잠시 우왕좌왕하던 농민군은 곧 전열을 가다듬고는 장태 뒤에 몸을 숨기고 세 방향에서 경군을 압박해 들어왔다. 장태는 원래 짐승들로부터 닭을 보호하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것인데, 농민군들은 사람 몇이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큼 크게 만들어 그 안을 짚 같은 것들로 채웠다. 대나무는 총알을 튕겨내고, 또한 안을 채웠으니 가볍지도 않아 제법 효과적인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처음에 쉽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경군은 삼면에서 장태를 앞세우고 달려드는 농민군에게 쫓겨 정신을 못 차리고 달아났다. 결국 지금 순의비가 서 있는 신호리까지 밀려와 “학승은 몸을 곧추세우고 ‘내가 대장인 누구다.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는데 어찌하여 역적들은 나를 죽이지 않는가’라고 크게 소리치다가 적탄에 맞아 쓰러지(「梧下記聞」 4월 23일조)”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경군과 함께 지방에서 징발된 향병까지 약 30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거두었다. 황룡강변에서 시작된 싸움이 경군과 농민군의 추격전으로 신호리까지 이어졌으니 이 주변이 모두 그날의 전적지였을 것이다. 황룡촌 전투의 승리는 농민군에게 자신들의 물리력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고, 명실공히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전라도 감영이 설치된 전주성을 별 저항 없이 점령할 수 있었다.
   농민전쟁이 끝나고 1897년에 이학승이 전사한 이곳 신호리에는 최익현이 찬撰한 순의비가 세워졌고, 이후 돌보는 이 없이 버려져 있다가 1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아 기념탑과 기념공원(1997년)을 조성하고 사적지로 지정(1998년)되었다. 비록 초라하고 쓸쓸하지만 무릇 답사는 이런 곳에서도 짜릿하고 역동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쳐내야 하며 그런 재미가 진짜 답사의 묘미 아니겠는가?
   이곳 황룡전적지 주변에는 하서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필암서원과 영화 <태백산맥>, <내 마음에 풍금>을 촬영한 금곡영화마을도 멀지 않다.

금창영 / 역사학연구소연구원 uriu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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