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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중스타가 된 근대의 기생
작성일
2012-06-1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505


근대 대중문화의 스타, 기생

우리나라에 ‘대중문화大衆文化’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조선일보> 1933년 4월 28일자 사설社說로 알려져 있다. 대중문화의 스타로서 연구 대상인 권번 기생은 시기상 백 년이 못 되는 과거를 가지고 있다.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거의 동시대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1930년대는 일제에 의해 ‘강제된 근대’로, 우리 민족의 처절한 수난시대에 해당된다. ‘근대近代’라는 개념은 아직까지 그것에 대한 개념 규정이나 내용에 관해 일치된 견해를 찾기 어렵지만 근대화의 척도 중 하나로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보급’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평양 기생 출신에서 대중스타로 변신한 왕수복(王壽福, 1917~2003)의 등장은 조선의 기생이 대중가요의 인기 가수로 변신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 이후 레코드 산업이 본격화되자, 당대 명기·명창들은 서둘러 레코드 업계로 진출한다. 레코드, 축음기의 보급으로 대중문화가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있었는데, 기생들은 레코드에서 배운 노래를 술자리에서 불러 유행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레코드 회사에서 보면 큰 고객이었다. 결국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중심축이 바로 전근대의 표상이었던 기생이었던 것이다. 대중 유행가의 여왕으로 기생 출신이었던 왕수복, 선우일선, 김복희가 <삼천리>(1935년) 잡지의 10대 가수 순위에서 5명의 여자 가수 중 1위, 2위, 5위를 한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영화, 패션, 광고 등에서 활약

초창기 영화에도 기생 출신의 영화배우가 중심이 되어 출연했다. 각종 전람회와 박람회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예능의 기예도 각 권번 기생들의 몫이었다. 예를 들어 보자. 경인철도 개통 초기에 손님이 거의 없을 때 철도회사는 승객을 유치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평양 명기 앵금’, ‘인천 기생 초선’ 하는 식으로 주요 역 정거장 마당에 기생 이름을 적은 푯말을 꽂아놓고, 일종의 라이브 공연을 벌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기생들이 기차 칸칸마다 타고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오가면서 승객 유치에 한몫을 했다.

신문광고에 등장하는 제품광고 및 잡지, 행사 포스터의 표지 사진, 웨이브 파마의 모델들도 기생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초창기의 인쇄광고는 사진을 쓰지 않았다. 1920~30년대는 광고에 모델을 등장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이들이 광고하는 제품을 통해, 당시 일반 대중이 받아들였던 기생의 이미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의 광고가 많은 연예인 중에서 제품의 이미지와 정확히 맞는 인물을 광고모델로 발탁하듯이, 기생을 모델로 한 광고도 그 형태나 소구방식이 지금과 흡사했다. 기생들은 유행을 선도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단발미인’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질 만큼, 이전 시대부터 시행해온 단발이 신여성들 사이에 다시 크게 유행했고, 여기에 웨이브 파마까지 등장했다. 당시의 권번 기생들은 현재의 연예인처럼 방송, 음악, 영화, CF, 행사 도우미, 모델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권번은 지금의 연예인 기획사나 매니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에는 사진도 대중화되면서 사진엽서가 대량 생산되고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사진이 도입되는 초창기에 카메라 앞에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 있던 기생들은 시대가 흐를수록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차츰 다양한 포즈로 자신을 드러냈다. 그리고 1920년대, 1930년대로 오면서 ‘조선풍속’이나 ‘기생’이란 제목 자체가 사라지더니, 이어 기생의 이름이 쓰인 사진엽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엽서 안에는 한 사람의 기생이 클로즈업되어 찍은 사진이 담겨 있다.

 

봉건사회의 표상에서 신여성으로

한국의 신여성은 개화기 이후 여성교육과 여성의 사회진출에 의해 생겨났다. 자의식을 가지고 사회 현실에 눈뜨기 시작한 이들은 세계 여성해방의 선진적 조류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으며, 기존의 유교적 도덕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여성들의 중심에 기생이 있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여성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생의 삶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기생들의 식견과 소양은 시대의 역동성에 힘입어 급류를 타기 시작한다. 기생은 분명 봉건시대에는 지탄의 대상이었고, 신여성과 여학생이 급부상하던 1910~1920년대 경성에서는 주변인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요릿집이 지식인들, 모던 보이들의 사교 공간이었던 만큼 그들의 술잔을 채우며 대화의 장에 함께 했던 기생들은 새로운 정보에 쉽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또한 1920~1930년대에는 대중문화를 선도하면서 유행가 가수와 영화배우로 세간의 비난과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 1927년 기생동인 잡지 『장한長恨』의 발간은 기생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기생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 혼란을 극복해보자는 자성의 소리였다.

 

사회사업에 기여한 기생들

1923년 진주 기생 김연경金燕卿, 김성귀金成龜, 박근영朴槿英, 문숙희文淑 등은 일신학교 대지를 무상으로 기부하는 이들에게 오찬을 제공하기로 하였고, 각계 기생들을 대상으로 기부금 모금에 나섰다. 1933년 전남 출신의 기생 장금향張錦香(1909~?)은 10년 동안 모은 재산의 일부를 사회사업에 내놓았다. 그녀의 본명은 장달막張達莫으로, 사회 보은의 의미에서 그동안 모았던 저금 중에서 현금 500원을 경성부 사회사업에, 또 500원을 자기의 출생지 전남도청에 각각 기부하였다. 이 기부를 접수한 경성부에서는 그녀의 생각이 기특하다고 하여 그것을 사회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지명하여 사용하였다.

1936년에 안악권번의 기생 최금홍崔錦紅은 안악에 고등 보통학교를 설립하는데, 그녀는 안악고보 설립에 적은 돈이나마 써달라고 하면서 현금 100원을 희사하였다. 또한 같은 해 원산 춘성권번의 기생 송학선宋鶴仙도 출신학교에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하였는데, 당시 학령아동 다수 초과로 제3보통학교 실현의 필요가 절실하던 원산에 제1보통학교 졸업생이었던 기생 송학선은 보교 학급 증설비로 300원을 희사하였다. 1930년대 남도 창唱으로 명성을 날렸던 이연숙李蓮淑도 사회사업으로 여생을 보낸 대표적 인물이다. 그녀는 동명목재 강석진姜錫鎭 사장 등과 더불어 미국에서 20세기 초에 시작된 문제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선도운동, 즉 BBS운동을 가장 먼저 일으켜 앞장서기도 했다.

 

글·사진·신현규 중앙대학교 교양학부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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