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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문화의 요람, 서원
작성일
2012-06-18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371

서원의 건립과 변천

소수서원이 처음 건립된 이래 한국의 서원은 지역별로 많은 사림을 양성하여 정계에 공급하였고 16세기 후반 사림은 마침내 집권을 실현하였으며 이후 18세기 초까지는 ‘사림의 시대’를 주도하였다.

서원은 제향과 강학의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관학인 향교와 크게 차이가 없었지만, 제향의 중심 대상이 공자와 그의 제자가 아닌 해당 지역과 연고가 있는 선현先賢이라는 점, 설립의 주체가 국가가 아닌 사림이라는 점, 설립의 동기와 배경이 과거 준비를 위한 곳이 아니라 학문하고 수양하는 곳이라는 점, 그리고 설립된 장소가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관여를 받는 군현의 소재지나 그 주변이 아니고, 경관이 빼어난 곳이라는 점에서 관학과 차이가 있다.

서원은 과거 준비나 공리주의가 아닌 인격을 도야하는 산실로 성리학 본연의 도학과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서원 교육은 일방적 강의나 지식 주입이 아니라, 서원생들의 자율적인 학습에 바탕을 두었다. 공부의 성취도도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 강회講會를 통하여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이해의 깊이를 깊게 하고 스승과 선배들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서원은 제향인물과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별, 학맥별 독특한 사상, 교육 방식, 운영 모습을 지닌다. 그리고 지방의 고급 인재들이 수시로 출입하고 접촉, 교류했던 거점공간이자 상징적 기구였으므로 교육과 강학 이외에 여론과 공론을 결집하는 집회소로도 큰 기능을 하였다.

17세기에 이르면 각 지역별로 서원이 경쟁적으로 건립되어 발전하였고, 학맥과 학파가 형성되면서 향촌사회에서 정치·사회적 활동을 벌이는 거점세력이 되어 갔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원의 건립이 급격히 증가하는 남설의 양상이 나타나 향촌사회의 공적 기구로서 본연의 서원 모습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서원의 남설로 서원의 질적 저하와 사회적 폐단이 야기되어, 영조 대에는 173개소의 서원과 사우를 훼철하는 강경책이 나타나기도 하였고, 서원은 마침내 1868년 대원군에 의하여 전국 47개소(서원 20, 사우 27)만 남기고 모두 철폐되기에 이르렀다.


‘선비문화’ 바로 보기

오늘날의 식자층 중에는 유교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유교문화, 양반문화는 전근대적·보수적·공리공론이라든가 비실용적이며, 파벌을 조장한 장본인이라는 등 부정일변도이며, 그래서 결국 유교문화는 극복 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게 된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 때문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유교문화의 본질이나 긍정적 가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문제점을 확대시킨 ‘유교, 성리학 비판론’에 익숙한 때문이다. 즉 유교망국론을 주장한 일제의 식민사관이라든가, 조선후기 실학의 성리학 비판, 그리고 서구 사조의 유입에 따른 전근대성 강조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이들의 일방적 비판은 실제 이상으로 유교문화의 병폐를 과장, 확대한 측면이 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조선말기의 퇴화, 변형, 굴절된 유교문화의 모습들, 예컨대 19세기 이후 양반지도층의 무능과 변질된 모습, 나아가 현대의 가문 이기주의나 파쟁의 모습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본질과 전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기적 병폐와 변질된 모습만을 보고 부정적으로 평가한 측면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은 이들의 정신, 즉 ‘선비정신’이 결코 보수적·관념적이라고 평가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선비정신은 오히려 그보다는 너무 개혁·혁신적이고 강경하여 보수 진영의 강한 견제를 받았다. 만약 유교문화가 그렇게 부정적인 것이었다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신 사조로서 500년을 지탱할 수 있었을까? 또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며 나라를 구하려던 충절의 행적이라든가, 도끼를 등에 지고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고자 했던 선비의 기개, 그리고 고고한 학문과 경륜에 대해 도덕적 실천까지 겸비했던 저명한 선비들의 정신사·지성사를 왜 우리는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조선의 선비들은 어떤 의미에서 관념적 추상적이기보다는 현실개혁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들이었다. 조선의 ‘양반-사족-선비’는 시대 지성으로서 특권세력의 사회경제적 독점에 반기를 들고, 향촌의 자율성을 추구하던 양심세력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조선시대 수백 년이 양반 중심의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조선조의 선비정신에서 올바르게 본받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부족하고 퇴색된 현실 비판과 개혁정신을 우선적으로 되찾는 일일 것이다.


오히려 현대사회에 더 절실한 선비정신

한편 현대사회는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共生’의 공동체의식이 점차 사라져가고, 정신보다는 물질이, 또 오로지 남을 딛고 올라서는 경쟁만이 살길이라는 ‘상쟁相爭’의 문화가 우리들을 압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서 도덕성의 타락과 참된 지성인의 부재가 커다란 문제로 지적되며, 우리의 현재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미래를 제시할 만한 ‘어른’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걱정들이다.

조선 시기는 누가 뭐래도 ‘지성과 도덕’이 존중된 사회였다. 그리고 <양반=선비>의 문화 수준, 지성적 수준은 엄밀하게 평가하여 현대 인문학의 수준보다 훨씬 높았다. 우선 방대한 문집의 양, 관심의 폭(문학, 철학, 역사, 경세학, 기타 종합과학), 학문 이외의 현실적 관심과 대응력, 그런가하면 제향의례를 비롯하여 사회교육과 도서관, 출판 기능 등 여러 문화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21세기에 오히려 필요한 것이 양반, 선비문화의 경쟁력이 아닌가 생각해 보곤 한다. 경쟁, 경제 중심 가치관은 인간성 상실과 가치관의 동요로 귀결되었고,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서 과거 선비의 종합적 삶의 가치와 방식이 상정되는 것이다. 그들은 경세가로서의 경쟁력도 있었고, 문화주도층이자 창조자였으며 양심과 도덕적 실천가였다. 과거사회를 이끌어 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 선비들의 경험 철학 속에는 도덕성, 변화에 대한 비판과 대응력, 진취적 참여와 실천력이 담겨져 있다. 양반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제대로 된 선비(양반)가 없어서 나라가 망했던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 조선시대 선비의 삶은 오늘의 지성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학문과 학자를 대우하며, 자기 수양의 정신자세 및 도의와 염치를 알고 도덕을 몸으로 실천했던 그들의 학문적 삶, 도덕적 실천의 삶, 개성과 자존심의 삶은 오히려 현대지성들이 귀감을 삼고 더욱 부러워해야 할 모범이라 할 만하다.

선비(유교)문화는 과거에도 의미가 있었지만 오히려 학문토론, 사회교육, 비판과 실천 등이 강조되는 현대와 미래사회에 더욱 필요한 지성인의 핵심 덕목이다. 지성사와 도덕적 실천, 어른스러움의 대명사였던 조선의 선비문화가 자랑스럽게, 그리고 글로벌 사회에서 한국정신사의 고급 브랜드로, 미래 경쟁력으로 되살아났으면 한다.

 

글·사진·이해준 공주대 사학과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한국서원학회장 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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