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사랑
- 제목
- 실크로드에 뿌린 신라인의 열정 왕오천축국전과 혜초
- 작성일
- 2015-03-09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7120
혜통에서 혜초로 이어지는 신라 승려의 환상
출가담도 출가담이려니와 그런 혜통이었으니 수행 또한 남달랐다. 혜통은 당나라로 가서 무외 삼장無畏三藏을 뵙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무외 삼장은 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 곧 중인도에서 태어나 716년에 당나라로 온 밀교의 시조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혜통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해가 665년이므로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밀교의 대표적인 승려였으므로 기록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스승이 혜통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혜통은 가벼이 물러서지 않고 부지런히 3년을 수행했다.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혜통은 뜨락 앞 에 서서 머리에 화로를 이었다. 잠깐 사이에 이마가 터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났다. 스승이 듣고 와서 이를 보더니,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찢어진 곳을 만지며 주문을 외웠다. 상처가 이전처럼 아물었는데, ‘왕王’자 무늬 같은 자국이 남았다. 그래서 호를 왕화상王和尙이 라 했다. 혜통의 정진精進이 목숨을 건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혜통이 이런 사람이었다면 또 한 사람 우리가 경의를 다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혜초(慧超, 704~787) 아닌가 한다. 그 또한 밀교를 연구하였고,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719년 중국의 광주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에게 배웠고, 723년경에 4년 정도 인도 여행을 한 뒤, 733년 에 장안의 천복사에 거주하였으며, 780년에는 산서성의 오대산에서 거주하였다. 필자는 혜초가 혜통의 어떤 연장선상에 있는 신라인의 기개로 환상될 때가 많다.
한번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순례자들
사실상 혜초는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인도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이 혜초인데 말이다. 오직 『왕오천축국전』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혜초가 쓴 시의 일부이다. 『왕오천축국전』이 돈황敦煌석굴의 깊은 곳에 묻혔다가 세상의 빛을 다시 본 것이 지금으로부터 겨 100여 년 전, 그나마 신라 출신이라는 사실 말고는 고향이며 죽은 곳도 알 길 없지만, 719년 열다섯살의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5년 동안 수학한 다음 결행한 4년간의 인도 여행을 어렴풋이 전해준다.
겨울날 투가라국에 있을 때 눈을 만나 그 느낌을 읊은 위의 시에서 우리는 무시무시한 고행의 한 단면을 읽을 뿐이다.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 정구井口엔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 불을 들고 땅 끝에 올라 노래 부르리 /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 가리오’
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을 오르는 그의 가슴 속에는 불같은 열정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파밀고원은 멀기만 하고 생사를 오가는 여행길은 불안하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런데도 두려운 마음을 때로 기도하며 때로 노래하며 풀어내고, 사막과 얼음 구덩이로 발걸음을 옮긴 그에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던 것일까? 같은 길을 따라 거슬러 왔던 전도자들을 생각하며 걸었던 것일까? 이런 여러 의문에 대한 답으로 그의 진취적인 정신밖에 댈게 없다.
중국 정통 밀교의 법맥을 이은 혜초
그러나 순례자의 마음인들 범 인 의 그것에 조금이나 가까운 것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의 하나일까? 혜초는 다른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 / 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 / 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마리 없어 / 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
기러기 발목에 편지를 묶어 날렸다는 고사가 있거니와, 그런 기러기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막막한 심정이 잘도 그려져 있다. 혜초가 언제 어떤 연유로 중국을 가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기록으로 그가 중국 밀교의 초조 금강지(金剛智, 671~741)의 문하에 들어간 것 이 719년, 곧 그의 나 이 열다섯살 때 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지는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스승의 문하에서 5년을 수학한 혜초는 감연히 인도 여행을 떠난다. 갈 때는 해로로, 돌아올 때는 육로를 이용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그가 남긴『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8세기경의 인도 풍경을 소략하게나마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물론 그의 존재는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P. Pelliot의 돈황 석굴 발견과, 1909년 중국인 나진옥(羅振玉, 1866~1940)의 손을 거쳐, 1915년 일본인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1856~1945)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천년 세월의 긴 잠을 잔 책 이 바로『왕오천축국전』이다.
그대 서번이 멀다 한숨 짓는가 / 나는 탄식하네, 동쪽 길 아득하여 / 길은 거칠고 설 령雪嶺 높은데 / 험한 골짝 물가에 도적떼 소리 치네 / 새는 날아가다 벼랑 보고 놀라고 / 사람도 가다 길을 잃는 곳 / 한 생애 눈물 닦을 일 없더니 / 오늘은 천 갈래 쏟아지네’
「서번가는 사신을 만나」라는 제목의 시이다. 서번은 서쪽 오랑캐 나라인 토번이다. 지금은 서장이라 부르는데, 이때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나라의 문물을 교류하며 번성하였다. 설령雪嶺은 눈 쌓인 봉우리이지만, 여기서는 히말라야산맥을 이른다. 한참 인도 여행 이 무르익을 무렵, 혜초는 우연히 서번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게 된다. 설령은 도적떼 출몰하는 계곡이었기에 대국의 사신답지 않게 코를 빼고 가고 있다. 처량한 모습이다. 그러나 하늘 나는 새마저 놀라는 길을 사람이 무슨 재주로 편히 지날 수 있겠는가. 승려인 혜초마저 펑펑 눈물을 쏟는다. 그런 고행의 대가代價였을까, 혜초는 귀국하여 스승의 총애 아래 수행 정진하여, 중국 밀교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금강지 불공不空 법맥을 잇는 제자로 우뚝 섰다.
글. 고운기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