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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식민지와 전쟁을 이겨낸 항공의 선각자들
작성일
2012-11-1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934



라이트형제보다 400년 앞선 비행

고려시대 한 관리인이 하늘을 나는 기계를 만들어 비상함으로써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으나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선 철종 때 고증학자인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에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이 왜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비거(하늘을 나는 수레라는 뜻)가 성중으로 날아 들어와 성주를 태우고 30리 밖에 이름으로써 인명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기록으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여암전서旅菴全書》의 ‘책차제策車制’에서 김제 사람인 정평구鄭平九가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은 “임진 연간에 영남의 읍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성의 우두머리에게 비거의 법을 가르쳐, 이것으로 30리 밖으로 날아가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영남의 진주성이 왜군에게 포위되자, 정평구는 평소의 재간을 이용하여 만든 비거를 타고 포위당한 성 안에 날아 들어가, 30리 성 밖까지 친지를 태우고 피란시켰다고 한다”라며 이규경의 기록과 거의 유사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비거에 대해 이규경은 “4명을 태울 수 있으며, 모양은 따오기(혹은 고니)와 같은 형으로서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서 공중에 떠올라 능히 백장百丈(200m)을 날 수 있되 양각풍羊角風(상승기류)이 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광풍이 불면 추락한다 하더라”고 설명하고 있다. 비거의 존재 여부는 최근까지도 논란과 관심의 대상이다. 30리를 난다는 비거를 복원하기 위해 2000년에 공군사관학교의 비거복원팀이 복원을 시도하여 건국대학교와 공동으로 제작 작업을 통해 1/2 크기의 실물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대나무와 무명천, 마끈 및 화선지 등만을 이용해 비차를 복원, 조선시대 우리의 조상도 하늘을 날았다”는 주장을 그대로 재현해 본 것이다. 복원된 비거는 2000년 12월 8일에 공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우리 조상들의 항공사상과 우리의 항공역사를 복원하는 상징으로 크게 기여하고 있다.



독립 항공입국의 꿈, 안창남

그러나 구한말의 도전과 시련 속에서 항공에 대한 우리나라의 열정도 크게 훼손되었다. 국가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면서 항공에 대한 꿈도 사라졌다가, 정작 비행기에 대한 호기심이 크게 자극된 것은 일본인에 의해서였다. 1913년의 일로 용산 연병장에서 일본 해군 소속 중위 나라하라가 최초의 비행을 하고, 이후 1914년 8월 18일에는 일본 민간인 다카소가 미국 커티스 복엽기로 용산에서 남대문까지 비행하여 서울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이와 같이 외국인들의 비행은 우리 국민에게 비행기에 대한 동경심과 호기심을 고조시켰다. 이에 조선인 안창남(安昌男, 1901∼1930)이 1921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오쿠리비행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5월에 한국인 최초로 비행면허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새로운 역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안창남은 1922년 12월에 손수 도색한 ‘금강호’를 타고 서울 여의도의 하늘을 날았다. 그의 고국방문 비행 소식은 언론에 대서특필되어 30만 경성 인구 중 5만 명의 관중이 몰려 온 대성황 속에 이루어졌다. 이 날 비행에 성공하면서 안창남은 식민지 조선의 설움을 승화시킨 일약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 비행에 이어 안창남은 그 해에 인천에서도 비행에 성공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강남 스타일’의 스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창남은 1924년 12월에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칠 것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이듬해에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과 접촉하고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에 가서 옌시산 항공대에 참여하면서 조국 해방의 뜻을 세운다. 1926년에는 비밀결사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내 잠입의 기회를 노리다가 1930년 4월 2일 중국의 산시 항공학교에서 갑작스럽게 추락사했다. 조국에 영광을 안기기 위해 29세의 몸을 던져 산화한 그의 비문에는 ‘비행장교를 영원히 가슴에 묻다永懷飛將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국전쟁은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파괴한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시기는 국산 항공기에 대한 꿈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쟁 시기인 1952년에 우리나라에서 설계하여 만든 최초의 항공기인 부활호(등록문화재 제411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부활호는 85마력짜리 왕복엔진을 장착한 길이 6.6미터, 폭 12.7m, 높이 2.07m의 경비행기급 항공기로 총 3대가 제작된 바 있다. 54년 비행시험을 했다는 기록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부활호는 2005년에 경북 경산의 한 고등학교 지하창고에서 그 기체가 발견되어, 말 그대로 역사 속에 부활한 기구한 항공기다. 발견된 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폐한 국민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 휘호를 하사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부활호가 복엽기인데 반해 해취호海鷲號는 더 수준이 높은 단엽기인데도 부활호보다 앞선 1951년에 제작되었다. 해취호는 미군이 쓰다가 추락하여 버린 AT-6 텍산 연습기를 주워다가 부낭을 달아 해상에서 사용하도록 개조한 항공기라는 사실만으로도 기막힌 손재주를 짐작케 한다.

한국인이 최초로 제작한 항공기이기는 하지만 미군 항공기를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국산 항공기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시기에 우리가 조잡한 수준이지만 현대식 항공기 제작에 매달린 것은 절박한 전쟁의 상황 때문이었다. 일단 비행기를 띄우기만 하면 공중에서 폭탄을 집어던지는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고, 당시 수준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전투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미군 항공기를 개조한 국산 항공기

우리가 제작하지는 않았으나 한국 전쟁 당시에 우리가 최초로 보유한 군용기는 L-4 연락기(등록문화재 제462호)였다. 1940년대 제작돼 1948년 9월 13일 공군의 전신인 육군항공대가 미군으로부터 10대를 인수한 프로펠러 비행기다. 도입 이후 여수·순천 사건이나 지리산 공비 관련 작전에 투입됐고 L-19 연락기가 도입되면서 1954년 퇴역했다.

L-4와 같이 운용했던 L-5 역시 무장도 없고 골조도 간단한 연락기였으나 이보다 한결 나은 T-6 택산이라는 훈련기를 같은 시기에 캐나다를 통해 10대 가량을 사오게 되는데, 흔히 말하는 ‘건국기’이다. 전쟁 시기에 한국군은 미군으로부터 2차 세계대전 때 활약했던 F-51D 머스탱을 도입하여 지상공격용으로 사용했다. 특히 북한군 보급루트 중 하나인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을 성공시킨 것이 바로 이 머스탱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공군은 한국전쟁 당시에 미그기를 상대로 엄청난 전공을 올린 제트전투기인 F-86 세이버를 전쟁 이후 도입하여, 한국공군 최초의 제트전투기를 보유하게 된다. 90년대까지도 소수의 F-86F가 사용되었으나 현재 모두 퇴역하여 F-51처럼 전쟁기념관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후원에 힘입어 1951년 미국 T-6기를 개조한 NK-1 통해호도 제작되었다. 취역한 지 석 달 만에 해취호는 바다에 추락했고, 그 뒤 해군 항공반은 새로운 수상항공기 제작에 도전하여 1954년 6월에 서해호를 세상에 내놨다. 미 공군의 L-5 연락기 엔진을 토대로 제작한 서해호는 바다에서 일본 어선을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 항공에 대한 열정과 꿈을 놓치지 않던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전쟁 후에 본격적으로 항공산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 것이다.

현재 세계 항공 산업은 소수의 백인 국가들에 의해 독점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15위권의 중견 항공국가로서 미래 항공 선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앞으로 제2의 안창남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글·김종대 디펜스21 플러스 편집장 사진·문화재청, 연합뉴스,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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