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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의 시간과 시계, 그리고 과학문화재
작성일
2012-11-1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7681



세종을 위한 천상의 시계

1438년 장영실은 자격루(국보 제229호)의 시계제작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세종에게 첨단적인 자동 물시계를 헌상하게 된다. 그것이 천상시계인 흠경각루이다. 세종은 흠경각(조선시대 세종 20년(1438)경복궁 안 강녕전 옆에 지은 전각. 여러 가지 천문기구를 설치했던 곳) 안에 설치된 흠경각루를 보면서 자연을 벗 삼고, 때로는 농사짓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균형 잡힌 국정을 위해 노력했다.

37명의 시보인형(종, 북, 징을 쳐서 시, 경, 점을 알리는 인형)들이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연출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진풍경이었을 것이다. 흠경각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가 운영되는 곳이면서 세종 자신이 백성을 생각하고, 국가를 운영하며, 정치를 구현하는 천상의 공간이었다.



 세종의 천문의기 제작과 시계 제작 프로젝트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세종대왕은 조선의 독자적 역법체계를 완성하기 위해서 천문의기 제작과 시계 제작 사업을 펼쳤다. 당시에는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중국에서 개발한 간의가 있었다. 간의는 중국에서 개발한 당시의 최신기기였다. 조선의 과학자들은 한양의 위도에 맞도록 간의를 개량했다. 나아가 실용성과 이동성이 겸비되도록 새로운 형태의 소간의를 제작했다. 이들 관측기기에는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백각환이라는 시계부품이 장착됐다.

세종시대에는 다양한 해시계가 제작됐다. 당시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였다. 궁궐에서 알려주는 자격루의 표준시간 이외에 종묘와 혜정교에서도 백성들이 마음껏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해시계를 설치했다. 이 해시계가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용 해시계인 앙부일구(보물 제845호)이다. 앙부일구는 시간은 물론 날짜까지 알 수 있었다. 앙부일구 시반면(그림자가 비치는 면)에는 시각선과 절기선이 바둑판 모습처럼 그려져 있다. 앙부일구는 천문정보와 예술적 아름다움이 담겨진 우리의 자랑스러운 과학문화재이다.

일 년의 길이를 측정하라

오늘날 1년의 길이는 약 365.2422일이다. 조선에서는 1년의 길이를 약 365.25일로 계산하여 사용하였다. 600여 년 전, 이렇게 정확한 1년의 길이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1년의 길이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규표’라는 측정기기가 있어 가능했다. 규표는 하루에 한 번만 측정하는 해시계라고 할 수 있다. 남쪽 하늘에서 태양이 가장 높이 올라왔을 때(남중시간) 그림자 길이를 측정한다. 규표의 구조는 수평방향으로 ‘규圭’가 놓여 있고, 수직방향으로 ‘표表’가 세워져 있다. 매일 매일 표가 만드는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게 되는데, 여름에는 짧고, 겨울에는 길다.

그림자 길이가 가장 길어진 날(동지날)부터 가장 짧아지다가(하지날) 다시 길어질 때(다음해 동지)까지 날 수를 측정해 보면 365일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측정을 매년 반복하게 되면 365일이 아닌 366일이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수년에서 수십 년 반복해서 1년의 길이를 측정하여 약 365.25일이라는 평균값을 얻게 된다. 이렇듯 1년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이 규표의 기본적 역할이었고, 표 그림자 길이로 1년 중에서 24기氣(12절기와 12중기) 날짜를 정했다. 이러한 규표의 측정은 오늘날 사용하는 양력을 측정하기 위한 장치였다. 조선시대는 음력 날짜와 더불어 규표를 사용하여 양력 날짜를 함께 사용했다.



17세기 최첨단 천문시계·송이영의 혼천시계

조선에서 1654년부터 시헌력을 시행하면서 새로운 역법에 부합하는 천문시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 서양에서는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기계식 톱니 기어를 갖춘 추동력의 시계를 사용했다. 시간의 정밀성을 높이기 위해 추동력을 일정한 속도로 내려가도록 하는 기술적 해결이 필요했다.

당시에 사용하던 폴리오트 방식의 시계장치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사람이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이다. 그는 1657년 세계 최초로 진자장치를 이용하여 정밀한 시계를 제작했다. 놀랍게도 이 진자장치는 1669년 조선으로 건너와 혼천시계의 동력장치로 사용됐다. 1669년에 제작한 혼천시계는 조선에서 발전시킨 혼천의 제작기술과 서양식 자명종의 동력을 결합해 제작한 독창적인 천문시계이다.

이 천문시계는 조선시대 관상감(당시의 천문기관)의 천문학교수였던 송이영(宋以穎, 1619~1692)이 만들었다. 그는 서양의 자명종을 연구하여 혼천의(국보 제230호)와 결합해 획기적인 시계를 발명했다. 송이영은 당시의 천문역법인 시헌력을 시행하는 데 높은 지식을 겸비했고 천문관측에 능통했던 대표적인 천문학자이다. 혼천시계는 홍문관(당시의 학술기관)으로 보내져 여러 학자가 천체운행의 원리와 서양 역법의 이해, 천문관측과 시간측정 교육에 활용했다.



조선 후기의 명품 시계-강건과 강윤 형제의 휴대용 앙부일구

조선시대 선비들도 오늘날 휴대폰보다 작은 크기의 시계를 지니고 다녔다. 진주 강씨 후손으로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낸 강윤(姜潤, 1830~1898)과 동생 강건(姜 , 1843~1909)이 만든 휴대용 해시계는 초소형으로 상아와 같은 고급 재료로 만들었다. 현재 이들 형제가 만든 해시계는 11점이 남아 있다.

강윤과 강건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증손이다. 그의 손자, 즉 두 형제의 큰아버지 강이중과 아버지 강이오는 또 다른 혼천시계를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건의 두 아들도 가업을 이어 해시계 제작을 했다. 이에 따라 중인 출신의 기술자가 아닌 명문가의 3대가 조선 후기 명품 휴대용 해시계의 전통을 이어갔다.

조선 사회에서 하늘의 움직임을 살펴 역법을 제정하고 하늘의 이치를 살펴 농사에 필요한 시時와 때를 알려주는 일은 국왕이 실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의 천문의기 제작과 시계 제작 기술은 오늘날 과학문화재 복원이라는 형식으로 새롭게 되살아나고 있다. 조선의 시간과 시계, 그리고 과학문화재는 선조들의 과학적 창의성이 담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과학유산이나 복원한 과학문화재는 전통기술과 미래과학을 연결해주는 든든한 토대가 되고있다.





글·사진·김상혁 한국천문연구원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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