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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선박 운송의 주역, 뱃사공
작성일
2023-06-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682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선박 운송의 주역, 뱃사공 지금은 다리가 있어 자유롭게 강을 건널 수 있지만, 다리가 없던 옛날에는 나룻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야 했다. 당시 나룻배를 부리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뱃사공이다.

내륙 수운의 중심지 한강에서 활약

옛날에는 사람이 직접 건너지 못하는 강이나 깊은 냇물에 나룻배를 두어 건너다니게 했다. 조선시대에 육상 교통로와 이어지는 하천 연변에는 나루가 설치되어 있었고, 중요한 나루에는 이를 관리하는 관원들을 두었다. 예를 들면 경강(한강)의 ‘한강도’ 나루의 경우 책임 관원인 도승 1인, 나룻배인 관선 15척과 사선을 두어, 도성 출입을 살피고 강물의 깊이를 측정하며 나루를 관리하게 했다. 당시에 나루터를 오가며 사람이나 짐을 나르는 나룻배를 ‘진선’ 또는 ‘도선’이라고 불렀다. 이 배는 관선과 사선으로 나뉘는데, 관선은 나라에 소속된 배이고 사선은 개인이 장만한 배다. 나루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관선의 경우 돈을 내지 않았지만, 사선은 뱃사공이 돈을 받고 강을 건너게 해 주었다. 큰 나루에는 관선 외에 사선을 두었다. 나루에는 크고 작은 나룻배가 있었다. 작은 배로는 사람을 태워 날랐고, 큰 배에는 우마차 등을 실었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나루에는 ‘진부’라고 불리는 뱃사공이 있었다. 진부는 작은 나루에는 네 명, 중간 정도의 나루에는 여섯 명, 큰 나루에는 열 명 이상 두었다. 이들에게는 나라에서 토지를 지급하여 그 수입으로 살아가게 했다. 강을 낀 마을에서는 장보기, 강 건너 농사짓기, 물건 싣기, 학교 다니기 등을 위해 나룻배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공동으로 배를 마련하여 뱃사공을 따로 두었고, 뱃사공에게는 봄,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뱃삯으로 주었다. 뱃사공은 천민으로 그 일을 대대로 물려받았다.


뱃사공은 매우 고달픈 직업이었다. 사람들이 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하면 한밤중이나 식사 중에라도 달려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난리가 났다. 현종 때 왕의 종친 몇 사람이 궁노를 거느린 채 한강을 건너 사냥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사냥을 마치고 동작나루로 돌아왔는데, 강을 건널 배를 얼른 대령하지 않았다고 하여 사공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나룻배는 튼튼하게 만들어졌지만 사람들이 몰리면 무리하게 사람들을 태우거나 많은 짐을 싣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는 나룻배가 뒤집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등 심심찮게 사고가 일어났다. 숙종 44년(1718)에는 과거시험을 치르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선비들이 한강 나루에서 배를 탔다가 배가 뒤집혀 80명이나 물에 빠져 죽었다.


한강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끼고 흘러 사람과 물자가 몰리는 내륙 수운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나루가 발달하여 뱃사공의 활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도시 근대화의 물결 속에 나루터가 있던 곳에 다리가 놓이면서 뱃사공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1950~60년대에는 광나루, 마포나루, 노들나루 등의 뱃사공들은 나루 한 곳당 100~2,000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한강에 양화대교, 한남대교, 마포대교, 잠실대교 등의 다리가 세워지면서 나루터가 사라져 뱃사공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든 뱃사공은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던 나루터에서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선박 운송의 주역이었다.


00.동아일보 1972년 7월 한강에 잠실대교가 세워지자 신천나루는 폐쇄되었다. 《동아일보》 1972년 12월 29일자에는 “신천나루의 마지막 뱃사공 김용태 씨가 25년 동안 뱃일만 해오다가 삿대를 잃고 성수동의 한 규석 공장 인부가 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동아일보》는 김용태 씨를 통해 “도시 근대화의 물결에 밀려 뱃사공들이 나루터를 떠나가는 현상”을 진단했다. ©동아디지털아카이브


글. 신현배(역사 칼럼니스트, 아동문학가) 일러스트. 박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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