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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제주도 돌문화의 상징을 담다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돌하르방〉
작성일
2023-06-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95

제주도 돌문화의 상징을 담다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돌하르방〉 조선시대 제주를 다녀간 외지인의 여행기, 시문집 등에서 확인되는 제주도의 첫인상은 마치 섬 전체가 날카로운 검은 돌로 뒤덮여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제주의 어디에나 널려 있는 돌은 제주의 문화를 설명할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키워드이며 이러한 돌문화의 대표주자로 돌하르방이 늘 자리하고 있다. 00.1-제주성 돌하르방 위치(1910년대 지적원도에 위치 표시 01.2-제주성 동문 밖 돌하르방(1914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삼읍의 땅이 모두 한라산 기슭에 있는지라 길이 험악하고 돌이 많고 메마르고 평토가 절반도 못되어 밭 가는 자는 생선 배의 뼈를 발라내는 것과 같고….”(김정 『충암집』)
“흙 두어 치 속으로 들어가도 모두 바위와 돌이다.”(김상헌 『남사록』)
“섬을 둘러 모두 바위다. 빽빽하고 높이 해안에 웅크리듯 꽂혀 있다.”(이형상 『남환박물』)


돌하르방은 언제, 왜 제작되었나

제주의 성문 앞 석상에 대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18년 간행된 심재 김석익(心齋 金錫翼, 1885∼1956)의 편년체 역사서 『탐라기년(耽羅紀年)』이다. 이 책에 ‘갑술 30년(청 건륭 19년) 목사 김몽규가 성문 밖에 옹중석을 세웠다(甲戌三十年 淸乾隆十九年 牧使金夢奎設翁仲石於城門外)’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에 해당하는 시기는 영조 30년인 1754년이다.


기록에 보이는 옹중은 중국 진시황 때 인물인 완옹중(阮翁仲)을 말한다. 완옹중은 용맹스러운 장수로 살아생전 그 명성이 흉노에까지 알려졌다. 완옹중이 죽자 진시황은 쇠로 그의 형상 12기를 만들어 성문 밖에 세워 두었는데 흉노가 침입해 오다 성문 앞 완옹중 상을 보고 그대로 도망갔다고 한다. 이후로 진나라 사람들은 완옹중을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 그의 형상을 구리나 돌로 만들어 궁궐이나 관아 앞에 세우게 되었고, 후에는 ‘옹중’이 동상이나 석상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을 보면 무덤 앞에 세운 석상, 길가에 세운 석장승, 풍수상의 이유로 세운 석상 등을 모두 옹중, 옹중석이라고 부르고 있다. 1754년 목사 김몽규가 성문 밖에 세웠다는 옹중석은 완옹중 이야기에서 보여주듯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했던 석상, 즉 지금의 돌하르방이며 각 문에 4기씩 12기 혹은 8기씩 24기의 수량으로 세워졌던 것 또한 이 이야기에 연원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읍성 앞 길목에 세워진 옹중석은 왜 ‘돌하르방’이 되었나

돌하르방은 조선시대 제주의 읍성인 제주성, 정의성, 대정성의 성문 앞 길목에 세워졌던 석상이다. 제주의 읍성은 동·서·남문 삼문이 있는 구조이며 각 문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받침돌 위에 올려진 돌하르방 4기가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세워졌다.


제주성에는 각 문 앞에 4기씩 2곳에 8기(<사진 1>의 붉은 점이 돌하르방의 위치), 대정성과 정의성의 문 앞에는 4기씩, 전체 돌하르방의 수량을 계산하면 총 48기가 세워졌다. 이 48기의 석상 중 제주성 남문 앞의 1기만 전하지 않고 있다. 제주성 동문 밖에 남아있던 4기(<사진 2> 참고) 중 2기는 1967년에 한국민속관(현 국립 민속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 제주도에는 총 45기가 남아 있다.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왜 돌하르방인가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싱거운 면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1971년 도민속자료로 지정할 때, 당시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두릉머리, 옹중석 등 지역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것을, 명칭의 통일을 위하여 ‘돌하르방’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명명하여 지정한 데서 유래한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에서 제외된 2기의 돌하르방 소장품 명칭이 ‘우석목’으로 등록되어 있는 것은, 1967년 제주성 동문 밖 돌하르방이 옮겨질 당시 이 지역에서 수집된 명칭임을 알 수 있다.


03.3-돌하르방 받침돌에 정낭(가로대)을 걸칠 수 있는 홈(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제주성 동문 돌하르방)

돌하르방에 담긴 상징적 의미

제주도는 ‘돌문화’라는 범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독특한 지역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돌하르방은 이러한 제주도의 환경적 요소를 수용하면서 만들어 낸 제주도 돌문화의 상징적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제주도에서 돌을 다루는 일은 나무를 다루는 일만큼 일상적이다. 다공질 현무암이라는, 재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생활용품이 돌로 만들어졌다. 다양한 생활 도구 제작 재료로 돌을 사용했던 제주민이, 읍성 앞에 세우는 상징물 제작 재료로 나무보다 돌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돌하르방 조형에는 제주공동체의 사회적 약속이 반영되어 있다. 읍성 앞에 세워진 돌하르방은 돌하르방과 받침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받침돌의 측면에 제주도의 대문 구실을 했던 정낭(가로대)을 걸칠 수 있는 홈을 내어 내부 공간에 대한 출입 금기를 담고 있다(<사진 3> 참고). 돌하르방 받침돌에 정낭을 걸쳤을 때의 높이가 고작 20~30㎝ 정도로, 이로 인해 직접적으로 출입이 통제된다고 할 수 없지만, 이 홈에 정낭이 걸쳐졌을 때 출입 금지라는 제주공동체의 강력한 사회적 약속이 발동되는 것이다.


돌하르방은 1754년 제주목사 김몽규에 의해 성문 앞에 세워졌다. 건립 시기가 명확하고, 주로 마을, 사찰 등의 민간 차원에서 제작된 다른 지방의 석장승과는 달리 관 주도로, 읍성 수호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설치되었다. 현재 다른 지방 석장승 중 읍성 수호 목적으로 세워졌던 소수의 석장승조차 점차 마을 신앙, 개인 신앙화된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해 제주도의 돌하르방은 여전히 강력한 읍성 수호의 상징물로 존재한다.




글, 사진. 김정선(제주공항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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