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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통과 서양의 원리가 만나다
작성일
2016-04-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7962

시간을 새기다. 전통과 서양의 원리가 만나다. 국보 제230호 혼천시계 진자의 균일한 움직임을 시간 측정에 활용한 유럽의 기계식 진자시계에다, 동양의 전통적인 물레바퀴식 시계 원리, 그리고 우주를 디스플레이하는 혼천의를 결합한 혼천시계는 1669년 관상감의 천문학 교수 송이영(宋以穎)이 동서양의 기술을 창의적으로 융합하여 만든 천문시계이다.

01 혼천시계 ©문화재청

성군은 시간으로 질서를 다스릴 수 있어야!

『서경(書經)』에 따르면 요임금은 희(羲)와 화(和)에게 명하여 역법을 만들고 순임금은 선기옥형이라는 천문 관측기기를 만들어 칠정(七政)을 바로 잡았다고 한다. 성군(聖君)의 모범인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문과 역법을 바로잡은 행위를 줄여서 관상수시(觀象授時)라고 하는데 이는 ‘천문을 살펴 시간을 받는다’는 뜻이다. 임금은 시간으로 질서를 창출하고 유지를 잘해야 성군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조선의 성군 세종은 이러한 관상수시를 위해 해시계, 물시계, 별시계를 만드니, 앙부일구·현주일구·천평 일구와 같은 해시계가 있고, 보루각 자격루와 흠경각 옥루 등이 전통적인 물시계이고, 일성정시의와 같은 별시계가 있었다.

세종 때 최고의 장인 장영실은 1434년(세종 16년)에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물시계인 자격루를 완성했으며 1438년(세종 20년)에는 흠경각루도 만들었다. 자격루에는 구슬과 숟가락 스위치 시스템이 사용되어 아라비아의 기술적 요소가 들어 있다. 이에 비해 우리가 흔히 옥루라고 칭하는 흠경각루는 중국의 전통적인 물레방아 바퀴가 사용되었다. 자격루가 국가 표준 시(時)를 측정하기 위한 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었다면, 흠경각루는 세종을 위한 장영실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중종 때는 자격루를 하나 더 만들어 창덕궁에도 설치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와 옥루는 불타 사라지고 창덕궁의 복제품만 살아 남았다. 광해군 때는 갖은 반대를 무릅쓰고 보루각과 흠경각을 중건했다.

02 자격루 ©문화재청 03 앙부일구 ©문화재청 04 휴대용 앙부일구 ©문화재청

중국과 일본을 통해 서양의 기계시계를 도입하다

조선 후기가 되자 중국을 경유하여 유럽의 최신 시계가 들어왔다. 1631년 정두원(鄭斗源)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에게서 자명종을 받아왔다. 당시 자명종은 알람이 달린 작은 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의 괘종시계를 지칭한다. 이것은 동양의 전통적인 시계와는 전혀 다른 기계시계였다. 다만, 유럽의 기계시계 발달사를 고찰해 보면 정두원이 가져온 자명종은 요즘 우리가 상상하는 시계추가 달린 진자시계는 아니었다.

혼천의 ©연합콘텐츠 혼천시계 중 혼천의 부분 ©문화재청

時間 혼천시계는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시계기술인 혼천의와 진자를 이용한 유럽의 최첨단 기계시계 기술이 결합된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자동시계들의 주요한 특징을 조화시켜 창의적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그 과학사적 의미가 크다.

유럽에서 기계시계의 주요 부품인 탈진기(脫進機)가 개발된 것은 13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14세기에는 유럽의 여러 교회에 기계 시계가 설치되었는데 정확도는 그리 높지 않아서 해시계로 눈금 조정을 해주어야 했다. 또한 시계의 동력은 무거운 추가 서서히 내려오면서 공급하게 되어 있었는데, 1410년경에는 태엽이 발명되어 시계를 소형화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었다.

시계의 정확성 개선에 획기적인 전기가 된 것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발견한 진자의 등시성(等時性)이었다. 네덜란드의 과학자 하위훤스(Huygens)가 이 물리학적 지식을 시계에 활용하였다. 그는 1650년경에 진자의 좌우 왕복 운동을 원형 톱니의 회전으로 바꿔주는 방식의 탈진기를 개발하였다. 이 기술을 적용하여 제작한 기계시계는 진자시계라고도 하며, 1930년대까지도 정밀한 시계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계시계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정두원이 가져온 자명종이 진자시계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동서양의 조화로 태어난 창조적 시계

효종 때인 1657년에 최유지(崔攸之)가 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누국(漏局)에 설치해 두었다. 그러나 약간 조잡한 데다가 수리할 곳이 발견되어 1664년(현종 5년) 3월에 성균관으로 옮겨다가 성균관 학생들이 함께 상의해서 고치도록 했다. 그 후 송이영과 이민철(李敏哲)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뜻에 따라 측후기(測候器)를 개조하도록 했고, 1669년(현종 10년)에 마침내 물의 힘으로 돌아가는 혼천의와 톱니바퀴로 움직이는 자명종이 완성되었다. 혼천의는 이민철이 만들었고, 자명종은 송이영이 만들었다.

이때 송이영이 만든 것이 바로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230호 혼천시계(渾天時計)이다. 혼천시계는 무거운 추가 내려오면서 만드는 동력을 쓰고 진자의 좌우 운동을 톱니의 회전 운동으로 바꾸는 진자시계이다. 그 시계의 동력이 혼천의에도 전해져 혼천의가 하늘의 일주운동과 꼭 맞게 돌아가게되어 있다. 최석정(崔錫鼎)의 『자명종명(自鳴鐘銘)』에 따르면, 이 시계는 일본에서 건너온 자명종을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이 시계는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시계기술인 혼천의와 진자를 이용한 유럽의 최첨단 기계시계 기술이 결합된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자동시계들의 주요한 특징을 조화시켜 창의적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그 과학사적 의미가 크다. 1986년 영국의 저명한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은 이 혼천시계를 자세히 연구하고 감탄한 나머지 세계 유명 과학박물관들은 반드시 이 시계의 복제품을 소장해야 한다며 극찬하기도 했다.

혼천시계를 발명한 송이영은 누구?

『연안송씨세보(延安宋氏世譜)』에 따르면, 송이영의 자(字)는 영보(穎甫)이고 1619년(광해군 11년) 음력 6월 10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송정수(宋廷修)는 무과에 합격한 군인이었는데 임진왜란때 의주까지 어가를 호위한 공으로 1605년(선조 38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봉해졌다. 그 덕으로 음서제도에 의해 송이영은 미관말직이나마 벼슬길에 나설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선산 김씨(善山 金氏)인데, 『승정원일기』 현종 원년인 1660년 3월 13일자 기록에, 영의정 정태화가 “송이영의 어머니가 능히 천문에 능통하므로 그 아들…”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비록 뒷부분에 여섯줄이나 결자가 있어서 무슨 말로 이어지는지 알기 어렵지만, 아마도 송이영이 어머니에게 천문 교육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짐작된다. 송이영은 3남 3녀 중 셋째 아들이다.

송이영에 관한 최초의 『승정원일기』 기록은 1659년 현종 즉위년 7월 20일에 “송이영을 광흥주부(廣興主簿)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그에 대한 사료를 종합해보면, 그는 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주로 여러 관서의 주부 등 하급 관리로 일했으며, 천문학에 뚜렷한 재능이 있어 관상감의 천문학 교수를 겸직하기도 하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가 자명종을 만든 공으로 승진을 하자 “잡스러운 기술로 출세를 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했지만 국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1692년(숙종 18년) 음력 12월 5일 별세했으며, 묘소는 황해도 배천(白川) 유곡면(柳谷面) 밥재(食峴)에 있다.

 

글‧안상현(한국천문연구원 이론천문연구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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