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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희원熙園에서 부르는 석상의 노래 - 유유자적
작성일
2007-02-20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218

유유자적

희원熙園에서 부르는 석상의 노래

글ㆍ김준식(소설가) / 일러스트ㆍ이진우

“가급적 가볍고 단순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사전 준비 없이.”
언제부턴가 문화재 답사나 미술관 관람 길에 나설 때 내가 꼭 배낭 속에 챙기는 마음자세다. 이렇게 하면, 어떤 것이든 성급한 예단을 피하고 있는 그대로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문화재나 예술품들은 그들 스스로가 관람자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 모두들 한 많은 인생처럼 자신의 내력과 존재 의미에 대한 답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그런 질문에 얽매임 없이, 보고 있어도 본다는 의식이 없어야 답사의 참 맛인 자적한 시간을 맛볼 수 있다는 생각을 이제야 겨우 하게 되었다.
하지만 올 겨울 용인에 있는 호암 미술관, 희원熙園을 찾을 땐 사뭇 달랐다. 가볍지도 단순하지도 않았다. 1982년 그 미술관이 개관한 이래, 나는 그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금사리라는 가마골에서 태어난 나는 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내 최정상급 도자기, 백자호에 이미 끌려 있었다. 그럼에도 20년을 넘게 그저 흘려보내야 했던 건 무겁던 80년대에 형성된 내 정신의 기본 프레임 때문이었지 싶다. 
만감이 교차하며 들어선 미술관은 즐거움이 먼저 앞섰다. 이 땅에 ‘문화재 답사’라는 문화를 불러일으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신도가 되어 다리품을 팔며 닦은 내공 덕분이리라. 이런 곳에서 으레 마주치는 초등학생 단체 관람객의 올망졸망한 모습도 정겹게 보이고, 벌거벗은 채 대지를 완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겨울나무의 골기가 더해주는 겨울 산의 정취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애인처럼 그리워한 저 유명한 백자호 앞에 마침내 섰을 때의 감회라니! 놀랍게도 내 몸에서 가장 먼저 뛰어나온 건 탄식이었다. 말로는 부족하여 폐부 깊숙한 곳의 진심을 날로 드러낸 채 터져 나오는 탄식. 그 백자호는 명성에 걸맞은 명품이었다. 좌우 대칭의 완벽한 비례감과 흰 비둘기의 접힌 날개처럼 고운 허리 동선.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숨이 딱 멈춘 그 자리에서 미의 모든 요소를 끌어안고 보는 이에게 절정의 미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거듭거듭 내 탄식을 이끌어 낸 것은 백자호가 지닌 색감이었다. 그건 색이 아니라 하나의 명징한 빛이었다. 빨주노초파남보, 모든 원색들이 모여 있다 긴 세월 동안 하나하나 빠져나가 최후에 남은 흰 빛줄기 몇 가닥이 다시 내부를 향해 단단히 뭉친 듯한 순백의 빛. 그러기에 그 백자호엔 지상의 무엇도 담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담아서는 절대로 안 될 것 같았다. 저토록 아름답고 오묘한 순백의 색을 빚어내기까지 수백 번 좌절감을 맛보았을 도공의 혼이 이미 그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아서였다. 아마도 그 도공은 비어있는 그릇이 그릇의 본질임을 아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고, 그 진가를 알아본 소장자 역시 수집가의 차원을 넘어 뛰어난 창조자였음이 틀림없으리라.
그런데 희원을 향하던 중 예기치 않던 또 다른 감흥이 나를 이끌었다. 전원 내 죽림 월대 등지에 전시된 100여 쌍이 넘는 벅수와 호숫가를 가득 메운 석인들. 그들은 마치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듯 서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내게 말을 걸어와 나를 기나긴 역사 속으로 데리고 갈 것 같았다.
원래 나는 이렇듯 갑작스런 상황과 마주치는 것을 즐겼다. 세련된 곳
문화재사랑

모두들 한 많은 인생처럼 자신의 내력과 존재 의미에 대한 답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그런 질문에 얽매임 없이 보고 있어도 본다는 의식이 없어야 답사의 참 맛인 자적한 시간을 맛볼 수 있다는 생각을 이제야 겨우 하게 되었다

엔 본래 충격적 미감이 없는 법이다. 준비 없이 낯선 무엇과 부딪혔을 때 본능적으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 터트린 환호야말로 순진무구한 즐거움의 정수 아닌던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과의 은밀한 재접촉을 통해 관능적 미감을 더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석상은 내게 무척 친근한 무엇이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석상의 노래’를 단 한번 보고, 그 자리에서 외워 버릴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석인을 보고 감동하는 게 나만은 아니어서 그 감흥이 더했다. 단체로 관람 온 초등학교 학생들 역시 석인들 앞에서 표정을 환하게 펴고 있었다. 특히 진실하고 순박하게 살아온 민중의 얼굴을 여지없이 담고 있는 벅수 곁에서 그랬다. 원래 완벽한 비례는 딱딱한 느낌을 주는 법인데, 아이들의 눈엔 그것이 저절로 보이는 듯했다. 비례를 잘 갖추고 화려한 관모와 공복을 입은 문인상 주위보다 비례를 무시하고 허虛와 졸拙을 그대로 수용한 동자상이나 할망 벅수 주위에 있는 아이들의 웃음이 훨씬 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예, 이것들이 왜 여기다 모여 있어예?”
마냥 석인들과 놀기에 바쁜 많은 아이들 틈에서 안내문을 찬찬히 읽어보던 아이가 물었다. ‘벅수는 장승의 또 다른 이름이며, 마을 공동체의 신앙대상물로 마을 입구나 성문 앞에 세웠고, 석상은 분묘 앞에 세워 죽은 이의 영혼을 호위하도록 했다’라고 안내판에는 쓰여 있었다.
“글쎄, 누가 왜 여기에 모아다 놓았을까? 암튼 누군가가 생각했겠지. 헌데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민희야”
“그래도 선생님예, 이 석인들도 원래 살던 곳이 그립지 않을까예? 그래서인지 저 할망 벅수가 슬퍼보이고만….”
재차 이어진 아이의 질문에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던 선생님은 질문한 아이를 동료들 무리에 밀어 넣은 것으로 적당히 수습한 후, 서둘러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석상들의 표정이 슬퍼 보이기도 하군.’
나는 엉뚱한 질문으로 재미난 분위기를 깬 아이가 주시하던 할망 벅수를 한동안 바라본 후, 천천히 걸었다.  
갑자기 언 호수에 한쪽 발을 빠트린 기분이 들었다. 이젠 시시비비를 접고 코앞을 스치는 경관에 나를 맡긴 채 걸어가면서도 걷고 있다는 것을 잊을 만큼 가벼운 답사 길을 소망했던 나였다. 그럼에도 조그만 아이의 질문 하나에 걸려 넘어지다니, 원 …….
소요유의 도에 이르려면, 아직 멀어도 한참이 멀지 싶었다. 나는 희원을 나오면서 괜찮은 관람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저 많은 석상을 잃은 묘들의 아픔이 발목에 걸려 휘청거렸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군병처럼 서 있는 저기 저 석상들 역시 아이가 말했듯 정말로 슬프지 싶었다. 적게는 수십 년에서 많게는 수백 년 동안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애환을 노래로 불러주던 그들이 아닌가.
‘누구 제 몸을 사랑할 분이 아니 계시 오리까/ 만약 그런 분이 있어/ 입이라도 맞춰준다면 이내 돌에서 풀려나련만….’
그래서일까, 아이들이 떠난 희원에서 오랜만에 불러보는 석상의 노래가 별로 빛나 보이지 않았다. 새삼 중심을 잡아보는 내 발걸음처럼 조금 어색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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