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사랑
- 제목
- 조선의 법제도와 인권의식, 사회정의를 구현하다
- 작성일
- 2015-01-09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11534
전통 법제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화가이자 여행가인 아널드 새비지 랜도어A.H. Savage-Landor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자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책에서 랜도어는 당시의 생활상과 풍물, 제도 등을 소개하고 있어 이 무렵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는 때때로 조선의 제도와 조선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예컨대 조선 사람들이 서양인 과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에 무감각해서 가혹한 형벌을 잘 견딘다는 언급이 그 한 예이다. 이처럼 한말 서양인들이 남긴 여행기를 읽다보면 조선 사회의 법제와 문화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흔히 동양의 전통사회 법제는 체계적이지 못했으며, 형벌 또한 서양에 비해 야만적이었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6세기까지 잔인한 형벌이 존재했던 유럽에 비해 중국은 그보다 한참 전인 7세기에 이미 우수한 당률唐律을 채택했으며, 우 리나라 역시 중국의 발달된 법률 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마치 서양은 우수한 법제도와 인권의식을 갖추고 있었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은 그렇지 못했다는 식의 이해는 서세동점의 시대에 서양 제국주의 국가가 만들어낸 편협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법과 정의는 시대를 불문하고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나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계속돼왔다. 조선의 사법제도는 나름의 제도적 체계성과 이념적 합리 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평등의식’ , ‘권리의식’ 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조선왕조 법전 편찬의 전통
정확히 언제부터 쓴것인지 알 수 없지만 ‘원님 재판하듯 한다’ 는 말이 있다. 원님 재판이라 하면 일정한 절차도 원칙도 없이 고을 원님이 제멋대로 판결을 내렸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사람사는 세상 에 그런 엉터리 같은 원님은 예나 지금이나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소송제도 자체가 허술했다거나 법제도가 미비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조선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법전 편찬에 힘쓸 정도로, 통일적 법전을 만들어 법치주의를 기본으로 할 것을 천명한 나라였다.『경국 대전經國大典』은 15세기의 끊임없는 법령 정비 작업의 결실이었다. 조선시대 법전은 이것으로 그친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대전속록』, 『대전후속록』, 『수교집록』, 『신보수교집록』, 『속대전』, 『대전통편』,『대전회통』등 무수히 많은 법전과 법령집, 판결지침서 등이 계속해서 편찬, 활용되었다. 이들 법전에 애민愛民과 민본民本사상이 깊숙이 들어있었음은 물론이다.
법을 통한 지배라는 원칙이 세워진 이상 자연스럽게 민간에서 벌어지는 각종 분쟁과 갈등을 조정, 해결할 수 있는 통로로 소송제도도 마련되었다. 흔히 조선의 법은 백성을 통제하기 위한 형법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산권과 권리 실현을 위한 민법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 또한 오해이다. 조선시대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소송이 매우 활발했다. 당시 사람들은 소송을 기피하거나 관아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의 권리 의식 또한 발달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고문서를 조사해보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관아에 소장訴狀을 제출하여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수 있었다. 실제로 1858년 충청도 연기현(지금의 세종시) 소송기록을 보면, 양반뿐만 아니라 여성, 노비, 심지어 죄수들까지도 관아에 소송장을 제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재판 결과가 억울할 경우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에게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고, 이어서 중앙 관청에까지 항소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안되면 신문고申聞鼓를 치거나, 상언上言·격쟁擊錚의 방식으로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길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소송 및 소원제도에는 백성들의 민원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해결 의지가 담겨 있었다. 중세적 민본의식이 근대적 민권의식으로 조금씩 진화해가고 있었다.
사형 판결 절차에 나타난 인명 존중 의식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명 존중 의식 또한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음을 형사 사법 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사극史劇에 나오는 것처럼 고을 원님들이 제멋대로 백성들에게 매질하거나 처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사법기관의 공권력 행사와 관련하여 주목 되는 사실은 각 기관별로 자체적으로 행사할 수있는 형벌의 상한이 엄격히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형벌은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의 다섯 등급으로 나뉘는데, 지방 군현의 수령은 가장 가벼운 태형의 형벌을 스스로 집행할 수 있었고, 이에 비해 관찰사와 중앙의 형조刑曹는 유형까지 가 능했다. 이는 상부의 보고 없이 지방관이 행사할 수 있는 형벌권이 수령은 태형, 관찰사는 유형까지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살인 등 사형에 해당하는 안건은 반드시 조정에 보고해야 했으며, 오직 국왕 만이 사형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국왕은 당시 최고의 재판관이었던 셈인데, 이는 형벌의 남용을 막고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사형 죄수에 대한 판결 절차를 살펴보자.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이 발생할 경우 여러 단계의 매우 신중한 조사와 심리를 거쳤다. 지방 에서 변사사건이 발생해서 관에 신고가 들어오면 고을 수령은 사건 수사를 맡았다.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한 시신의 검시 및 관련자들에 대한 신문을 종합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1차 수사는 끝이난다. 하지만 수사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으며, 수사의 공정 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웃 고을 수령이 2차 검시 및 수사를 진행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수사결과는 관찰사를 거쳐 중앙의 형조에 보고되었고, 국왕의 최종 심리를 거쳤다.
그런데 국왕이 사건을 판결할 때에는 한 차례의 심리로 마무리하는 법이 없었다.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수 안건은 법전 규정에 따라 조정 관리들의 입회하에 무려 3차에 걸친 논의 끝에 형을 확정하였으니, 사형 집행에 그만큼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형사 재판에서 원통한 죽음, 억울한 죄수를 없애고자 하는 노력이 적지 않게 제도화되어 있었다. 형벌을 삼가고 신중하라는 『서경書經』의 ‘흠휼欽恤’ 정신은 조선시대 형사 재판에서의 실천 윤리 였으니, 여기에서 우리가 오늘날 인권 의식의 연원을 추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법고창신法古創新의자세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채택하였고, 조선의 지배세력은 유교 국가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조선왕조의 국왕과 관료 들은 유학적 수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민본에 기초한 법제 정비에도 힘을 썼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강조했듯이 지금까지의 부정적 편견을 걷어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선의 법제와 사법체계를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조선사람들은 공공의 이익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가? 이와 관련한 제도적 장치는 어떤 것들이 있었고, 어떤 한계가 있었는가?
고금을 막론하고 법은 사람들의 삶과 매우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과거는 결코 현재와 동떨어진 먼 옛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보다 나은, 공평무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훌륭한 전통에서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자세 또한 필요하다.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글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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