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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작성일
2013-03-14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13599



옛 여성의 삶과 결혼

고대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결혼 풍습이 있었다. 이 풍습에 따라 혼사가 정해지면 신부 집 안에 사위집을 지었고, 결혼 후 신랑은 처갓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자녀가 태어나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 신부는 신랑의 집으로 들어갔다. 신부 집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풍습은 여러 신화에도 나타난다.

유화와 해모수는 결혼하기로 했으나 해모수가 떠나가고, 유화 혼자서 주몽을 낳아 길렀다.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기록은 아예 없거나 어머니 혼자서 자녀를 기르는 것이 흔했다. 전쟁이 빈번했던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전쟁에서 승리한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다. 이때부터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 아버지의 뒤를 이을 자식이 누구인지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 시대 여성들은 결혼 이후 친정에서 남편과 함께 살았으며, 재산분배에서 있어서도 남녀 구분 없이 상속되었다. 또한 제사를 지낼 때도 모든 아들과 딸이 돌아가면서 제사 지내거나 제사에 드는 경비도 나누어 냈다. 절에 시주 할 때도 남편과 아내가 따로따로 시주하였다. 호적에 기록할 때에도 아들, 딸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와 같은 불교행사에 젊은 남녀가 밖으로 나가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또한 고려 여성들은 금강산에 있는 유명사찰을 방문하는 것을 최고 낙으로 여겼다. 외출의 기회가 많았던 고려 귀족의 딸들은 저고리, 치마위에 백포(흰색의 도포)를 입고 다녔으며, 저고리 폭이 넓어서 여러 겹으로 입었다. 치마의 폭 역시 넓고 길어, 치마 안에 속바지를 입었는데, 말을 탈 때에는 바지를 입었다.

1392년 세워진 조선은 중국의 성리학을 국본國本으로 삼았고, 이는 여성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며 성리학자였던 정도전은 처가살이 결혼 때문에 여성들이 교만하다며 중국의 결혼제도인 친영제親迎制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영제는 신랑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살림을 하는 것이다. 최초의 친영제는 세종 때 숙순옹주(서고모)의 결혼부터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처가살이 결혼 풍습이 계속되었고, 이에 명종임금과 대신들은 반친영제라는 새로운 결혼제도를 마련하였다. 반친영제란 신부집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며칠간 신부 집에 머물렀다가 신랑 집으로 들어가는 제도로, 성리학이 조선사회에 널리 퍼지면서 반친영제가 확산되어 갔다. 조선 여성의 삶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성리학적 제도는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는 재가녀 금고법再嫁女 禁錮法이었다. 재가녀 금고법을 실행하기 위해 재혼한 어머니의 자식은 과거시험 응시를 금지하였다. 그 후 많은 어머니들은 자식의 장래를 위해 재혼하지 않고 어려운 가정경제를 이끌며 자식을 키웠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큰 전쟁을 겪으면서 농사짓던 땅은 황폐화 되었고, 온갖 종류의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많은 백성들이 죽고 일본과 청나라로 끌려갔다. 오랜 전쟁으로 사회질서가 무너지자 나라에서는 충신, 효자, 열녀제도를 마련하여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고자 하였고, 목숨을 바친 열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여성의 정치·경제·사회 활동

신라의 화랑제도는 진흥왕 때 처음으로 만들어진 원화제도源花制度에 그 전통을 두고 있다. 진흥왕은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함께 놀게 해서 그들의 행동을 보고 인재를 선발했다. 이때 뽑힌 300여 명의 여성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사이에 우애를, 나라에 충성하고 신라를 위해 수련을 닦았다. 이를 원화제도라고 하며 여성의 지도력과 사회적 지위를 인정한 공식적인 제도이다. 신라시대에는 여성들이 제사를 주관하고 종교행사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은 여왕이 출현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추석명절은 신라시대 ‘가베’에서 유래되었는데, 매년 7월 16일부터 8월 14일까지 신라의 서라벌 여성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베짜기 경연대회를 열었다. 길쌈대회는 국가적 큰 행사였으며, 베를 짜는 기술은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여성들이 익혀야 할 필수항목이었다. 심지어 백제는 베를 잘 짜는 여성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기술을 전수해 주기도 했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늘 바쁘게 살았다. 여성들은 가사, 출산, 육아 농사, 직조 등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였다. 무명, 명주, 삼베, 모시는 여성들이 만들었다. 양잠일은 여성들의 일이었고, 왕실의 여성들도 잠실蠶室(현재의 잠실지역)을 설치하여 양잠기술을 일반 백성들에게 전수하였다. 봄이 되면 망태를 들고 들과 산을 누비며 나물을 뜯었고, 여름에는 호미를 들고 가을에는 낫을 들고 김매기를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의 여성들은 가사일, 길쌈, 삯바느질 행상, 해녀, 상업 등 여러 가지 다양한 경제활동으로 가족을 부양했으며, 이들의 경제활동은 실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여성의 직업과 역할

성리학의 엄격한 내외법內外法 실행으로 여의사가 필요했다. 이에 조선 태종 때 의녀제도가 만들어졌다. 비록 신분적으로 천민이었지만 당시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지식인층이었다. 의녀는 인명을 다루기 때문에 의술뿐 만 아니라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학문을 익혔다. 의녀들은 조산원 역할뿐 아니라 침을 놓는 의료인의 역할을 하였으며, 사대부가 여성들의 사치여부를 감찰하거나, 죄를 지은 여성들을 수색하는 역할도 맡았다. 이것은 내외법에 따른 결과이며, 여러 가지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의녀들은 자신들의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여 전문직 여성으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았다.

조선 시대에는 600여 명의 궁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관리였다. 이들은 왕실의 음식, 의류, 잠자리 경비 등 여러 가지 일을 맡았다. 왕의 침실을 돌보는 ‘지밀상궁’은 지위가 가장 높았으며, 침방에서는 왕과 왕비들의 옷을 만들었고, 수방에서는 그 옷에 수를 놓는 일을 하였고, 소주방에서는 음식을 준비하였다. 궁녀들은 매달 쌀 서 말과 옷감으로 월급을 받았던 조선시대 공무원이었던 셈이다.
한편 가무를 특기로 궁중이나 사대부들의 연회에 동원되어 흥을 돋우는 일을 했던 기녀는 전통문화의 계승자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의 문화적 특색을 살려 재능을 발휘하였는데, 유학의 경서에 능한 안동기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을 줄줄 외운 관동 기녀, 검무에 능한 의주기녀 등 이들 기녀들 덕분에 전통적인 가무와 시가문학이 오늘날까지 전승될 수 있었다.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제사를 주관했던 무녀 또한 뚜렷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했다. 왕실에서는 나라에 전염병이 돌거나 가뭄이 들면 무녀를 불러 굿을 하였으며, 왕실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굿을 하기도 했다. 무녀들은 답답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안한 민중들의 해결사 및 상담사 역할을 하였다.
18세기 말 천주교라는 서양의 종교가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는 처음에 종교가 아니라 학문(서학)으로 받아들여졌다. 천주 앞에는 양반, 상놈도 없고, 부자와 가난뱅이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다. 불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여성들이 가장 먼저 불교의 신도가 되었고, 불교를 널리 전파하는데 앞장 섰듯이, 천주교의 전파에도 여성들이 큰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우리나라 여성들은 각각의 시대가 요구하는 이념과 질서에 순응하면서, 혹은 도전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왔다.

글. 이성숙 (국립여성사전시관 관장) 사진.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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