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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개성 고려궁성 남북공동 발굴조사 고려왕조 500년의 중심 만월대를 가다
작성일
2007-09-07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202

 hspace=5 src=개성은 500년 고려의 수도로서 고려궁성을 비롯한 왕건릉, 공민왕릉 등의 수많은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는 민족 문화의 보고이다. 그 중 ‘만월대’라 불리는 궁성 유적은 고려시대 정치·사회·경제의 중심지로서 화려했던 당시의 문화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궁성 유적은 흔히 ‘만월대’로 불리고 있으나, ‘만월대’라는 명칭은 이미 폐허로 변한 뒤 붙여진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만월대를 정전 앞 계단이라고 기록한 이후 마치 본래 이름인 것처럼 사용되었는데, 이밖에도 ‘건덕전터’·‘연경궁’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궁성에 여러 이름을 붙인 것은 당시 거란·몽고 등의 침입으로 큰 화재만 4회 이상을 거쳤으며, 홍건적의 침입 이후 복구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과 북,
유구한 고려 역사 현장 앞에 하나 되어 서다

궁성 유적의 발굴은 2005년 남북역사학자협회가 ‘세계문화유산 등재 지원을 위한 남북공동학술회의’를 개최한 자리에서 최초로 제안하여 2007년 5월 18일 착수식을 시작으로 발굴의 첫 삽을 뜨게 되었다. 사실 발굴 이전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어 ‘개성 땅을 밟기는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남측 CIQ에서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북측 CIQ를 향해 달리는 도로에서는 북측으로 넘어간다는 불안감 보다 먼저 넘어간 발굴 장비가 북측의 검사를 무사히 통과했을 지가 보다 걱정되었다. 조사단이 북측 CIQ에 도착하여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나가니,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이하 ‘민화협) 담당자가 나와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아보고 북한 사람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라서 그런가. 그쪽도 그렇고 우리도 의외로 담담했다. 각자의 짐을 숙소에 풀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민화협 측이 제공한 차량으로 개성 시내를 통과하여 유적이 위치한 송악동으로 향했다. 다들 ‘만월대’를 볼 기대에 부풀어서 달리는 차창 밖으로 개성 시가지를 열심히 관찰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송악동에 도착하여 광명천을 오른쪽에 끼고 신봉문 중앙을 지나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북측 조사단이 나와 있었다. 회색 작업복에 작업모를 맞춰 쓰고 나온 30명의 북측 조사단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hspace=5 src=남과 북이 함께한 이번 발굴은 남측의 남북역사학자협의회와 문화재청,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와 문화보존지도국이 주관하여 이루어졌다. 그리고 유적의 발굴 조사는 남측의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북측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었다. 이번에 조사한 지역은 유적의 중심인 회경전 서편에 위치한 30,000㎡의 대지로서 송악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의 아랫부분에 해당된다. 조사 지역은 남북방향으로 7~8개의 단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각 단은 넓은 평탄지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 중 가장 넓은 지역에 조사 지역의 중심을 정한 뒤 남쪽을 북측이 북쪽을 남측이 조사하기로 하였다. 이번 조사의 성격은 유구의 유무를 판단하는 시굴 조사로서, 동-서-남-북의 4방향으로 25m 간격의 구획을 정한 뒤 시굴갱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우거진 잡목과 풀을 베고 시굴갱을 파내려가니 표토에서 얼마 내려가지 않아 건물지의 초석과 기단들이 나타났다. 기단의 가장 아랫부분 근처에서는 불에 탄 흔적과 함께 다량의 기와편과 자기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적에서는 이러한 건물지의 흔적과 함께 다수의 축대도 확인되었다. 궁성이 자리 잡은 송악산 기슭은 도선국사가 명당으로 지목한 곳으로 ‘마두명당馬頭明堂·부소명당扶蘇明堂·송악명당松嶽明堂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궁궐이 들 hspace=5 src=어서기엔 경사가 너무 가파르게 보였으며 지형도 고르지 못했다. 이러한 지형상의 문제점을 고려 사람들은 축대를 이용한 건축으로 극복하였다. 축대들의 높이는 각각 다르나 주변의 여러 건축군들과 높이를 맞추어 축조되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계단과 전도塼道를 이용해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하였다. 이렇듯 고려 궁성의 건물들은 다양한 축대가 만든 평탄면에 매우 조밀하게 조성되어 있어 축대의 규모와 높이에 의해 실제 건물의 규모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웅장해 보였을 것이라 추측되었다. 특히 회경전 축대는 높이뿐 아니라 올라가는 계단의 가파르기가 매우 심하여, 아래에서 회경전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을 것이리라. 이러한 건축적인 부분 외에도 당시에는 수많은 군사가 갑옷과 병장기로 무장을 한 채 경비를 서고 각 건물마다 화려한 휘장과 깃발로 장식을 하였을 것이니 그 위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붕과 기둥이 모두 무너져 내린 지금도 그 터의 웅장함만으로 보는 이들의 상상력을 한없이 이끌어내는 유적의 힘 앞에 남과 북의 조사단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남북공동 발굴조사, 그 가슴 벅찬 순간을 돌이켜 보면…

이번 조사의 성과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성과라고 한다면 남과 북이 만나 함께 발굴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북 공동 발굴의 예는 몇 차례 있었으나 60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함께 발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북한 사람들과 장기간 발굴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으나, 막상 만나서 함께 조사를 진행하다 보니 그네들 역시 우리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한 민족임을 느끼게 되었다.
두 번째는 기존의 고려사·중세고고학 연구에 활력을 불어 넣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시대는 분명히 한국사에서 중세라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다른 시기에 비해 연구의 대중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이 북한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고려사』와 『고려도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궁성 유적의 배치양상 복원 작업에서 확인된 문제점을 현지답사와 시굴을 통해 보완하게 된 것은 고고학적 조사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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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조사 구역 전역에 대한 시굴 조사를 통해 회경전 서편 구역에 대한 건물 배치 양상을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조사 구역 내에서는 수십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이러한 건물지는 각각의 성격에 맞게 적절히 배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건물지는 조사 구역의 북서편에서 확인된 5개의 예단 기초 시설이 확인된 건물로서 『고려사』의 기록에 보이는 ‘경령전景靈殿’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경령전은 종묘 외에 궁궐에 세운 별도의 시설로서 설날·단오 등의 명절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국왕의 즉위·후비와 태자의 책봉을 고하기도 하였다. 또한 경령전 터 주변에서 범자梵字문양이 찍힌 막새기와가 집중적으로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연등대회와 같은 불교 행사가 이루어졌다는 『고려사』의 기사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네 번째는 길이 65㎝, 폭 22.2㎝인 이형청자와 명문이 찍힌 기와 등 총 800여 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는 것이다. 이형청자는 원통형으로 끝부분이 모두 둥글납작하게 막힌 상태이며, 양 끝단의 중앙에 구멍이 뚫려 있어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매우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명문기와는 암수기와의 등 문양 위에 명문을 스템프로 찍어서 표현하였다. 명문은 「赤項文昌」,「赤項京夫」,「赤項惠文」,「赤項文京」등과 「板積水金」,「月盖○○」등으로 구분되며 이들 명문기와는 개성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板積○○」,「月盖○○」명 기와는 『고려사』에 보이는  ‘板積窯’, ‘月盖窯’ 기사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된다.
끝으로 이번 조사를 통해 유적의 범위가 기존의 ‘만월대’라 불리던 회경전 주변뿐 아니라 매우 넓게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궁성 유적에 대한 보존과 체계적인 발굴 조사의 필요성에 대해 남북 모두가 깊이 있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또한 향후, 궁성 유적에 대한 장기적이며 체계적인 조사 계획과 발굴 조사 이후 궁성 유적의 보존 방안에 대해서도 여러 모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 /사진 제공 : 박성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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