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사랑
- 제목
- 우리는 왜 위인의 생가에 가는가?
- 작성일
- 2015-04-01
- 작성자
- 국가유산청
- 조회수
- 2960
두물머리 근처에서 노닐다 늦게 도착한 우리는 닫힌 생가 옆 제월대薺月臺에서 하늘에 뜬 반달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씩 나눠 마셨다. 화서의 대쪽 같은 위정척사 사상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우린 느꼈다. 유인석, 김평묵, 양헌수, 최익현 등 기라성 같은 선비들의 스승 아닌가? 나는 막걸리 한 잔 따라드리려묘역으로 올랐는데, 아뿔싸 5단 묘역에 멧돼지 방지용 고압선으로 둘러쳐 있어 못들어가고 맨 아래 묘에 예를 표하고 내려 왔다. 그날 막혔던 제월대에 새겨진 화서의 글씨를 돌아와 찾아보니 화서의 성품그대로이다. ‘엷은 구름도 남기지 말고 맑은 빛을 점철 되게 하라(莫遺微雲點綴練光) / 끝까지 비우고 끝까지 밝게 하여 태양과 짝하라(極虛極明以配太陽)’
다음날 다산 생가와 묘역이 있는 다산 유적지에 갔다. 그 곳에‘여유당與猶堂’이 있다. ‘與猶’는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글귀로 餘裕나 旅遊의 뜻이 아니라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경구 이다. 與와 猶는 의심과 겁이 많은 동물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뜻이다. 나는 다산 묘에 올라 여쭸다. 그렇게 경계했음에도 오랜 세월 유배갈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한스럽지는 않으시냐고? 간밤비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이 깔린 길을 따라가 바라본 한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남한강변 신원역 뒤에는 숨겨진 보석 같은 여운형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해방 전후 역사의 가장 중심에 있다 쓰러진, 태양을 치마폭에 받는 태몽을 꾸고 태어난 몽양 여운형.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이 피를 끓게 하였지만 딸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본 순간 그의 잘생긴 얼굴과 수염이 정겨워졌다. 기념관에서 생가로 오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와 몽양과 사진을 함께 찍을 수 있는 코너는 다른 기념관도 따라 해봄직하다.
나는 화서, 다산, 몽양 선생의 생가에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따른 그들의 사상이나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았다. 다만 이들 모두 자신들만의 세계를 갖고 살았다는 점은 위대해 보였다. 더불어서 이들 모두 내면에는 따뜻한 인간미가 있었음을 알았다. 흉년으로 떠돌아다니는 백성의 참상을 말할 적에는 눈물을 흘렸다는 화서. 김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인 유배시절 정실 아내가 보낸 치마를 잘라 시집간 딸과 소실의 딸을 위해 두점의 매조도를 그려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는 다산. 중국 유학 시 야구선수로 활동하며 장학금 받은 몽양. 이들의 교과서 밖 사실들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도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하고 생각할 때 가 많지만 “내가 중용 외기를 만 번까지 하였는데, 한 번 욀 때마다 뜻이 달랐다. 내가 살아서 다시 중용을 외운다면 무엇을 깨닫게 될 지 참으로 두렵다.”라고 하신 화서의 말씀이 무겁게 들려온다.
글·사진. 신익수 (대전광역시 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