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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사랑

제목
지리의 시공간 의식이 만든 지도, 선조들의 세계관을 읽다
작성일
2014-12-05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7832

지리의 시공간 의식이 만든 지도, 선조들의 세계관을 읽다.
인간은 지리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 공존해 사는 삶의 터전을 종합적으로 연구해왔다. 그리고 지도를 통해 지리를 표

현하면서 지형·자원·토양·기후 등 자연의 모습과 도시·인구·교통·산업·문화 등 인간의 생활 모습을 배웠다. 

그래서 지도는 당시의 천지관(天地觀)과 세계관의 변화가 담긴 당대 사회 모습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었다. 이에 오

랫동안 지도를 제작해오며 그 속에 담긴 세계관과 지리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01.『천지도』, 채색사본, 18세기 ⓒ

서울역사박물관

 

통상 고지도라 하면 어딘지 모르게 텁텁하면서도 딱딱한 느낌을 풍기는 것 같다. 고서화 같이 빼어난 시각미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전통이라는 분위기가 풍기는 고리타분함 때문일까?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도를 과학의 영 역으로만 인식하려는 성향 때문일 것이다.

지리부도에 수록된 각종의 투영법을 사용한 지도들, 위성사진, 지구본 등과 같은 서구문명의 세례를 받은 것들이 우리의 옛 지도들을 과학의 영역에서 보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지도와 서양의 과학과는 커다란 간 극이 존재한다. 따라서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옛 지도를 볼 때 캐어낼 수 있는 의미는 그다지 크지 않다.

옛 지도는 과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역사의 기록이며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 된다. 단순히 지리적 실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넘어 그 시대, 그 지역에서 살았던 인간들의 신념과 가치체계, 더 나아가 주변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도 아스라이 스며있다. 옛 지도는 선조들이 살던 세계,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보러가는 일종의 타임머신인 셈이다.

 

지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 사상이 담긴 지도

사람들은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주변 세계에 대한 독특한 관념을 지녀 왔다. 이러한 관념은 그들이 지닌 문화 에 따라 서로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고대로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과 유사한 패턴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과는 다른 형태로 변용되기도 했다.

근대 이전의 전통시대에서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주변 세계는 크게 천상인 하늘과 천하인 땅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 사회에서는 이 두 영역이 별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 속 에서 존재한다. 서양에서는 천상의 세계가 지상의 세계와 분리된 신이 주재하는 영역이지만, 동양에서는 지상의 질 서가 천상에 투영되기도 하고 천상의 변화가 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러한 천지 상관적 사 고로 인해 하늘을 그린 천문도에 지상의 공간 질서가 표현되기도 하고 땅을 그린 지도에 천상의 별자리가 그려지기 도 했던 것이다.

『천지도(天地圖)』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지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에 따라 하늘은 둥글고 땅은 사각형으로 그 렸는데, 둥근 원 둘레에 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28수(宿)를 그려 천지의 상관적 관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사 각형 내부에는 중국과 주변 나라를 그려 넣었고 그 외곽에는 목성의 운행주기에 따라 구분한 12차(次)의 이름이 방 위 표시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사각형 바깥에 그려진 별자리에는 할당된 지상의 영역이 있는데 별자리의 변화를 관 찰하여 해당 지역의 변화를 예측하는 점성술에 이용되기도 했다.

천지도와 같이 하늘과 땅을 같이 그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세계지도는 사각형의 형태로 천하를 표현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긴 이름을 지닌 지도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한 직후인 1395년 『천상열차분야지도(天上列次分野之圖) 』라는 천문도가 국가의 중요한 사업으로 제작됐다. 이것의 후속 사업으로 1402년(태종2)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지도 와 일본 사신을 통해 입수한 일본지도, 그리고 조선의 지도를 합쳐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제작됐다. 이 지도를 보면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유럽 지역까지도 그려져 있어서 당시 제작된 지도로서는 세계 적으로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이미 고려시대 축적된 활발한 대외 교류와 이 시기 형성되는 대외 관계의 개방적 태도 등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이러한 지도를 통해 조선은 온 천하에 왕조의 개창을 드러내 보이고 문화국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02.『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채색사본, 일본 류코쿠대 소장본의 모사본 ⓒ서울대 규장

각한국학연구원 03. 『천하고금대총편람도』, 목판본, 김수홍 ⓒ서울역사박물관

04.『지구전후도』의 『지구전도』, 목판본, 최한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05. 2 

3 『천하도』, 채색사본 ⓒ영남대박물관

 

성리학으로 바라본 화이사상으로 그린 조선시대의 지도

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열린 세계를 지향하려 했던 조선 사회는 16세기 이후 주자성리학이 사회의 운 영원리로서 정착되면서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처럼 다양한 국가들과의 교류는 점차 약화되고 중국, 일본 등의 동아시아 일대로 좁혀지게 됐다. 조선 중기 이후의 세계지도는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지도들이 많다. 초기의 아프리카, 아라비아는 이 시기 이후로 관심의 영역에서 거의 사라지게 됐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天下古今 大摠便覽圖)』는 이 시기 대표적인 세계지도로서 전통적인 화이론(華夷論)적 관점에서 중국을 크게 과장해서 그리고 주변의 나라들은 국명만 표기하는 정도에 그쳤다.

사상적으로 주자성리학의 안정적인 지배가 계속되던 조선사회는 17세기를 거치면서부터 북경의 사신들을 통해 서 양의 문물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주로 북경에 거주하던 서양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양의 천문, 지리, 역법 등 의 서학서와 한역세계지도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서구식 세계지도는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 다. 당시까지 성리학적 화이론에 매몰되어 있던 지식인들에게 5대주로 구성된 세계지도는 자신의 세계관과는 합치될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둥근 지구를 전제로 한 투영법을 바탕으로 경위도를 그려 넣은 지도는 조선의 유 학자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김석문, 홍대용, 최한기 등 일부의 실학자들은 지구설(地球說)을 바탕으로 서구식 세계지도를 이해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최한기는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라는 서구식 세계지 도를 김정호와 함께 제작했다.

반면에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서구식 세계지도를 해석하려 했다. 당시까지 그 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세계는 중국과 그 주변지역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신대륙, 오세아니아 등은 그들의 전통적 세계관에서는 포섭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 지역은 가볼 수도 없고 실체의 확인도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였다. 이러한 미지의 세계를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이해하려 했는데, 중국 고대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괴상하고 기이한 나라들로 이들 지역을 대치시켰던 것이다. 눈이 하나 달린 사람들이 사는 일목국(一目國), 몸뚱이가 셋인 사람들이 사는 삼신국(三身國),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이 사는 관흉국(貫 胸國) 등과 같은 기괴한 나라들을 배치하여 그린 세계지도가 원형의 천하도라 할 수 있다.

『천하도』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모습으로 되어 있고 중심에서부터 내대륙, 내해, 외대륙, 외해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내대륙에는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시 실제로 존재하고 있던 나라들이다. 중앙 에는 천지의 중심인 곤륜산이 자리 잡고 있다. 내해와 외대륙에는 『산해경』에 나오는 기괴한 나라들이 표기되어 있다. 가장 외곽에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곳에 각각 부상(扶桑)과 반격송(盤格松)이 그려져 있고, 내해의 일본국 밑에는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 등의 삼신산이 그려져 신선사상도 담겨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실재와 미지의 세계가 섞여 있는 원형의 천하도는 17세기 이후 조선의 지식인층에 광범하게 유포됐고 현 재에도 필사본, 목판본을 통틀어 십여 종 이상이 남아 있어서 단일 지도로는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서구식 세계지도가 일찍부터 조선사회로 유입되어 일부 실학자층을 중심으로 유포되기도 했으나 그 양은 적은 편 이었다. 오히려 서구식 세계지도의 역할을 원형의 천하도가 대신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밀려오는 19세기 후반에도 원형의 천하도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여전히 세계의 모습으로 인 정되고 있었다.

 

왕조의 개창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열린 세계를 지향하려 했던 조선 사회는 16세기 이후 

주자성리학이 사회의 운영원리로서 정착되면서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처럼 다양한 국가들과의 교류는 

점차 약화되고 중국, 일본 등의 동아시아 일대로 좁혀지게 됐다.

 

글 오상학(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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