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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도 풍류 1번지 유상대流觴臺를 찾아서 - 유유자적
작성일
2007-04-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2851

최치원崔致遠은 서쪽에서 대당을 섬기고, 동으로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항상 난세를 만나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여 산림과 강, 바다를 떠돌며 누대와 정자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놓고 시詩를 읊었다. 경주의 남산과 강주의 빙산, 협주의 청양사와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창원)의 별장이 그가 놀았던 곳이다.
- 『사기열전 최치원 조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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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스터리의 인물을 찾아 그가 유상대流觴臺를 차리고 놀았다는 칠보면으로 간다. 칠보면이 어디인가? 칠보댐이 있는 칠보는 신라 때의 태산군이다. 정읍시 칠보면 칠보댐이 위치한 사산리 577의 2의 유상대 터는, 경주의 포석정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쌍벽을 이룬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현장이다. 이름하여 남도 풍류의 1번지. 포석정 터는 경주 남산 서쪽 계곡의 신라 이궁離宮 안에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헌강왕(875~885)이 솔밭 속에서 곡수연을 벌이고 춤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성 연대는 어림 잡아 8~9세기로 추정된다. 유상연을 하던 석구石溝는 축이 10.3m, 가운데 폭이 5m로 돌 홈이 구불구불하여 곡수거曲水渠라 부르는데 술잔이 흘러내려 자기 앞에 오면 시를 한 수씩 읊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풍류가 깃든 현장인가?
또 경애왕 4년(927) 10월에는 왕이 자결을 하여 나라의 패망을 재촉했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후세에 들어 ‘신라는 포석정에서 망하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망했다’고 백성들에게 술을 삼가라는 기록(세종실록)도 남겨져 있다. 풍류의 장이든 망국의 장이든 그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일제가 포석정을 애써 사적 제 1호로 지정한 것도 다분히 이 약점을 노렸을 듯하다. 아무튼 포석정은 실로 신비롭기 그지 없다.
때에 이르러 최치원도 만년에 이곳에서 태산(태인)군 태수를 지냈는데, 이때 칠보천(반곡천 : 동진강 상류)가에 유상대를 만들고 유림(선비)들과 놀았다. 6두품의 해외파로서 권력의 핵심부에는 있지 못하였지만, 변방의 주요 관직을 두루 섭렵했으므로 상영觴詠의 재미를 누구보다도 만끽했을 터이다. 그가 당시 태수로 있던 칠보면 소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칠보천과 그 지류인 고운천을 양쪽으로 끼고 흐르는 솔밭 사이에 물길만 잡아 돌렸으면 곡수거를 차리기에는 충분한 지형이다. 지금도 조상우가 쓴 유상대의 내력을 알리는 유상대비流觴臺碑가 감운정 마당에 세워져 있어 그 장소 비정이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특히, 숙종 8년(1682)에 홍문관 부제학 조지겸이 지은 유상대비문은 실증 자료로 중요한 문건인 듯하다. 감운정感雲亭 또한 최치원이 즐기던 유상터에 그를 추모하며 백여 년 전에 지은 정자다. 남도 풍류의 맥을 정립하고 싶어 이번 겨울에 다시 찾았는데, 아쉽게도 몇 년 전과는 달리 모두 철거하여 발굴현장 터만 보존되어 있었다.
태인이 호남 3대 명촌 중의 하나가 된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무성리의 무성서원과 유상대 사이를 끼고 흐르는 반곡천이 동진강의 최상류가 되는 땅에서 현재 칠보댐의 도수로는 섬진강을 가로 막고 있고, 이 도수로 터널을 뚫어 생긴 물줄기는 칠보, 정읍, 배들 백산 평야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 우선 이 탯 자리를 눈여겨보면, 정극인과 송세림 같은 문맥들이 이 선풍의 물줄기에서 칠보문풍으로 깔끔하게 정제되어 ‘태인 향약’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이 칠보문풍이 다름 아닌 태산풍류泰山風流인 것이다. 
태산풍류는 다시 남도의 무등산 계곡으로 뻗쳐 계산풍류溪山風流 즉, 원혼문풍과 적벽풍류赤壁風流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곡수거曲水渠의 상영觴詠은 ‘최치원의 유상곡수연’에서 ‘태인 향약의 정극인’을 거쳐 ‘남도의 자연원림自然原林’으로 그 장소가 바뀐다. 이는 16세기 사림들의 시가 문학이 등장하면서, 면앙정가단의 송순과 정철의 송강가사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남도 풍류는 최치원의 태산풍류에서 칠보문풍을 타고 계산풍류인 원효문풍과 적벽풍류로 굳혀졌다 할 것이다.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민족 신화의 근원인 태백산 신단수神壇樹원림이 그 기원이며, 제정일치 시대의 고신도古神道가 대모신앙의 체계를 형성하여 선불유도로 승합한 것이 민족 선풍으로 그 기상을 드높인 것이다. 때로는 미륵정토의 선풍으로 때로는 청유선풍으로 하나의 바람을 타고 일어남과 같다. 이른바 이것이 국토에서 마지막 살아남은 섬진강 상류에서 칠보산을 타고 넘어 동진강 상류로 불어 내리는 산바람, 강바람이며, 통일신라 때부터 완전한 교육 제도로 정착된 풍류황권(화랑의 호적부)이다. 이 선맥仙脈은 우리들의 표면적인 행동에선 실천윤리의 덕목으로 표출되고(동학혁명), 심미적 정서면에선 한恨과 멋으로 나타난다고 보여진다. 음식에서는 구강성과 즉흥성으로 나타나고, 이 맛이 소리로 가서는 뻘을 밟거나 땅을 밟는 남도 소리(판소리)가 되며, 기법으로 가면 덤벙 기법, 가락으로 가면 허튼가락이 된다. 이 허튼가락에서 시나위가 발생하며(남도 무가), 다시 악기로 가면 퉁소(대금·중금·소금)나 거문고 산조가 되어 민중의 가락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 유상대流觴臺 옛 터를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남도 풍류의 맥을 정립하는 첫걸음이 될 줄 믿는다. 따라서 이런 터가 있는 듯 없는 듯 방치되고 있음은 문화재 발굴과 보존에 있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풍류의 맥이야말로 우리 고유 선풍의 원류가 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글ㆍ송수권 시인 / 일러스트ㆍ이진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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