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페이지 경로
기능버튼모음
본문

규제혁신

제목
[문화재답사기] 통일전에서 이견대까지
작성자
문화재청
작성일
2006-11-23
조회수
3708
작성자 : 장윤성님 (민족사관고등학교 2학년) [2006 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가작(9위) 수상작]

태종 무열왕이 661년에 세상을 떠나자, 태자 법민은 왕위를 이어받아 신라 제 30대 문무왕이 된다. 654년에 이미 병부령이 되었고, 660년에는 김유신 장군과 함께 신라군을 지휘하여 백제 정벌을 한 경험이 있는 태자 법민이 36세에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는 모습은 당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부활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된 663년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며, 이후에도 계속된 고구려와의 교전으로 인해 피곤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664년에 김유신 장군이 나이 70세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나려 하자 극구 만류한 것은 그의 어려운 처지를 짐작하게 한다.

665년 혹은 666년에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이 죽자, 668년 신라는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이 때 김유신 장군은 중풍으로 인해 경주에 머물었으며, 문무왕은 주 병력이 당나라 군사와 평양을 침공할 때 지금의 서울 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평양의 부근에도 가지 않은 고구려 정복을 신라에 의한 통일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민족사(民族史)에 대한 명확한 관점(觀點) 없이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삼국통일을 기념하여 1970년대에 건립한 경주의 통일전을 들어 선다. 일요일 아침 통일전은 적막의 초절정이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니 우측에 비석이 3개가 나란히 서 있다. 흘려서 쓴 한자이기에 읽기 힘들었지만 <태종 무열왕 사적비>, <문무대왕 사적비>, <태대각간 김유신 사적비>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 장군은 흥덕왕 때 흥무대왕의 칭호를 받았는데,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다소 의아스럽다. 좀 더 올라가면 통일에 기여한 세 명의 영정이 걸려있는 통일전이 있다. 여기까지 오른 목적은 단 하나, 문무대왕의 영정을 보기 위해서이다. 영정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오랫동안 그 인물에 대해 연구한다고 한다. 치솟은 눈썹, 날카로운 눈빛, 반듯한 코, 굳게 닫힌 입술, 당당한 풍채 상상했던 모습처럼 멋지다. 한편 태종 무열왕의 영정은 문무대왕보다 부드러운 인상이다.

그런데 무열왕도 백제를 정벌할 때 부여성으로 가지 않고 금돌성으로 물러나 주둔한다. 무열왕은 660년 5월 김유신, 진주, 천존 장군 등과 함께 10만 군사를 이끌고 이천으로 갔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옥천으로 내려온다. 이 때 흠순과 품일 장군은 정예군 5만명을 경주에서 곧바로 옥천으로 이끌고 온다. 옥천에서 김유신 장군은 흠순, 품일 장군과 함께 정예군 5만으로 사비성을 침공하고, 무열왕은 행군으로 지친 10만 군사를 금돌성으로 옮겨 진을 친다.

이런 조치는 약소국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인다. 백제를 정복한 당나라의 다음 표적은 신라이었을 것이다. 무열왕은 당나라의 신라 침공에 대비해서 10만 군사로 강력한 수비 진영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무왕이 서울에 머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김유신 장군은 경주에 머물면서 왜국에 사신을 보낸다. 왜국은 668년 9월 26일 한 배 가득한 선물을 보내어 오고, 사흘 후에는 새로 건조된 배 한 척을 또 선물로 보내온다. 그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고구려 침공으로 인해 느슨해진 신라의 후방으로 왜국이 침공해 오는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왜국은 왜국대로 고구려를 정복한 신라와 당나라군이 침공해 올 것을 염려했던 것은 물론이다.

670년에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급히 귀국하여 임박한 당나라의 침공을 전한다. 명랑법사가 그 대비책으로 낭산에 사천왕사를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 정식으로 절을 짓지 못하고 비단으로 절의 경계를 둘러친 후, 볏짚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명랑법사가 승려와 함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니 침입하던 당나라의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통일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천왕사지는 현재 발굴 중이지만, 동선을 설치해 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낭산의 자락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는 사천왕사 터에는 건물 초석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을 뿐이다. 선덕여왕의 능이 있는 낭산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동해남부선 기차가 휑하니 지나간다. 동해남부선은 일본 강점기 때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사천왕사를 두 동강내면서 가로 질러가고 있다. 그 때문일까? 머리가 잘려진 귀부(龜趺)는 처절했던 과거의 아픔을 기억이라도 하는 듯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670년은 왜국이 국호를 일본으로 한다고 알려온 해이다.

673년에는 김유신 장군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축국(蹴鞠)놀이를 하다가 고의로 옷고름을 밟는다. 큰 여동생인 보희 대신 작은 여동생인 문희가 옷고름을 달아 주면서 춘추와 문희는 관계를 맺게 되고 문희는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하게 된다. 한 날 김유신은 가문에 먹칠을 한 문희를 태워죽이겠다는 연출을 하고,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공주는 남산에서 이를 보고 춘추에게 구하라고 하여 둘은 혼인하게 된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다. 김춘추는 태종 무열왕이므로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삼촌인 된다. 그런데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춘추가 결혼을 하지 못한 이유는 원래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춘추와 문희의 결혼식은 현재의 포석정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674년에는 왕궁 내에 정원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679년에는 그 정원의 서쪽에 태자궁이 만들어 지는데 이 정원이 바로 안압지로 알려진 월지(月池)이며 태자궁은 임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의 소성왕 원년(799) 기록을 보면 우두주(牛頭州) 도독이 사자를 보내 아룁기를 “소 같이 생긴 이상한 짐승이 있는데,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의 길이가 세 자 가량이나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긴 놈이 현성천(峴城川)으로부터 오식양(烏食壤)으로 향하여 갔습니다”라고 했다. 이 동물은 코끼리일 것이데, 아마도 월지에 있었던 왕실 동물원에서 탈출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동해남부선은 임해전지를 역시 가로 질러 가고 있다. 임해전지는 현재 울타리가 쳐진 것보다 훨씬 넓었던 것이다. 675년 매소성에 20만 당나라 군사가 진을 치고 있었다. 보병과 기병이 7:3으로 혼합된 군대였다. 일반적으로 말을 탄 기병은 평지에서는 보병의 8배, 경사진 곳에서는 4배의 전투력을 가진다고 하니, 당나라 군사의 전투력은 38만의 보병에 맞먹는 것이었다. 마침내 당나라의 대규모 침공이 시작되었는데 이에 맞서는 신라군은 전략적인 위치에 진을 치고는 있었지만 숫자가 3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 결과 신라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고 3만 마리가 넘는 당군의 말을 빼앗았다.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9년(669)의 기록이다. 당나라 사신이 쇠뇌 기술자 구진천(仇珍川)을 데리고 갔다. 당에서 그에게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30보 나갔다.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내가 듣기에 너희 나라에서 쇠뇌를 만들어 쏘면 1천 보를 나간다고 하는데, 지금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 구진천이 대답하였다. “재목이 좋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나무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에 천자가 사신을 보내 재목을 구하자 곧 대나마 복한(福漢)을 보내 나무를 바쳤다. 다시 만들게 하여 쏘았는데 60보를 나갔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신도 역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아마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나무에 습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천자는 그가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무거운 벌로써 위협하였으나 끝내 자기의 재주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

또 하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4년(674)의 기록이다. 영묘사 앞 길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였다. 육진병법이란 병사를 여섯 집단으로 나누어 지휘부를 꽃잎처럼 둘러싸는 형태로 진을 지는데, 활, 긴 창, 칼, 도끼로 무장된 전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군사전략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무기, 새로운 전략, 그리고 당나라의 군사수송로를 차단할 수 있었던 신라의 해군력이 전쟁의 승리를 약속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후 문무왕은 681년 7월 1일에 세상을 떠난다. 유언으로 태자를 자신의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고, 죽고 나서 10일이 지나면 곧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하고, 동해 어구 큰 바위 위에 장사를 지내라고 했다.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낭산 자락의 능지탑은 도로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연꽃모양으로 장식된 석재들이 시선을 끄는데, 12지신상은 3개가 유실되어 있다. 또한 주변에는 복원공사 후 남은 석재가 많이 남아있어 복원공사가 적절하게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쥐 상의 표현 양식은 다른 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동해 남부선은 또 다시 능지탑 앞을 스쳐 지나고 있다.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일본의 침입을 막겠다는 문무왕과 관련된 유적들이 유린된 현장에서 나는 슬픔과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다.

경주에서 차로 30분 이상 달려가야 하는 감포 바닷가에 있는 문무왕의 수중릉은 접근하기 곤란하다. 갈매기가 유난히 많이 넘나드는 대왕암을 해변에서 쳐다보고 있는데, 파도소리를 깨고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멀리서 무당들이 굿을 하고 있다. 동해의 신에게 호소하는 것일까 아니면 대왕암에 있는 문무왕에게 호소하는 것일까? 문무왕이 세상을 떠난 그 다음 해 신문왕은 문무왕이 끝내지 못하고 간 절을 완공하고, 그 절의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고 했다.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감은사에는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건물 하부에 지하층이 만들어져 있다. 문무왕의 자취를 따라 떠난 답사는 슬프게 끝나고 있다. 슬픔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매소성 전투를 대 승리로 이끌어 낸 문무왕은 대답은 자명한 것이라고 동해의 바다 한가운데서 가만히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첨부파일
  • 등록된 파일이 없습니다.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만족도조사선택 확인
메뉴담당자 : 법무감사담당관실
페이지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