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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과 문화재
작성일
2006-03-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249



기마민족이라고 불릴 만큼 용맹한 기질을 과시했던 우리 민족은 전쟁터에서 주력군이 궁병이었던 만큼 활을 사랑했다. 그러나 소총이 생기면서부터 활은 전쟁무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점차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활 만드는 일도 별 볼일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활 만들기 외길로 40여 년을 살아온 궁시장 김박영 옹에게 활은 생명이었고 단순한 기술 이상의 자기 수양과정이었다. ‘궁시장’은 나의 천직이요… 경기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 성주산 기슭의 활터인 ‘성무정聖武亭’ 1층에 자리 잡은 3평 남짓한 부천공방에서 풀결음(물소뿔에 풀을 바르는 것)을 하고 있는 김박영 옹을 만났다. 스승 김장환(85년 작고) 선생 증조부 때부터 5대째 내리 궁을 만들어 오고 있는 그는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예천은 예로부터 활로 유명한 지역으로, 지금 한 오십대 넘게 먹은 사람들 중에 예천 황신동이 고향인 사람들은 누구나 다 활을 만들 줄 알 정도로 궁의 고장이었다. 선친 또한 궁시장이었는데, 부친 김홍경 씨 슬하에서 이것저것 잔심부름 일을 한 것이 활과의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정작 활을 만드는 일에 뛰어든 것은 그의 나이 서른이 다 되어서였다고 한다. “군대 제대 후 장사 말고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그 때만 해도 활을 만들어서 세상 살아가기란 좀체 어려운 일이어서 선뜻 뛰어들 수가 없었지요. 물론 마음에야 늘 있었지만… 그런데 어떤 일을 해보아도 도무지 취미에 맞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경북 예천에서 활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장인이었던 고종사촌인 이치우(작고) 씨 밑에서 활 만드는 일을 거들어 주며 생활했다. 그러다가 ‘소사에서 쓸 사람을 구한다더라’고 넌지시 건네준 친구의 말을 듣고 고종사촌 거드는 일을 그만두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경기궁의 명인 김장환 선생을 찾아 갔다. 그 당시 김장환 선생은 국궁제작으로 꽤 명망 높던 분이었고 경기궁 하면 누구나 최고급품으로 쳐 주기가 예사였다. 그리고 그 전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재주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분은 활 만드는 솜씨가 아주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 맘에 들게 활을 만든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이 꼭 꼬집어 가르치는 법도 없어서 한 가지 일을 익히려면 수십 번을 반복해야 겨우 터득할 수 있었지요. 그때는 그것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오히려 빨리 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궁을 제작하는 김박영 옹
<궁을 제작하는 김박영 옹>
예천에서도 많은 궁이 생산이 되는데, 경기궁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경기궁과 예천궁은 만드는 방법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활을 쏘았을 때, 예천궁은 탄력이 떨어졌다. 유난히 힘이 센 스승 김장환 선생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뛰어난 조궁 솜씨를 지녔을 뿐 아니라 활을 쏘는 실력도 각별했다. 그러나 1984년 여름, 혹독하리만치 엄했던 스승은 영원히 세상과 이별했고 어른 밑에서 한솥밥 먹으며 하루하루 보냈던 20년 세월은 그렇게 끝이 났다. 각궁의 우수성과 그 정성 김박영 옹이 만드는 우리 활 이름은 ‘각궁’이다. ‘맥궁’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는 물소뿔이 주재료로써 사용되어졌기에 이를 각궁이라 하였고 맥족, 즉 고구려 민족의 활이라고 해서 맥궁이라고 불리워진다. 기록상 각궁은 삼국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당서唐書에 ‘각궁’이란 말이 나오고, 고구려 서기 222(산상왕 26년)부터 사용했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세계에서 활 모양이 둥근 것은 우리의 각궁뿐이다. 이 각궁의 특징 중 하나는 쏘는 사람의 기력에 따라 힘조절이 가능한 ‘살아 있는 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활을 만드는 장인을 궁인弓人, 화살을 만드는 장인을 시인矢人이라 부른다. 두 번째 특징은 요즈음 첨단 소재로 만든 양궁에 비해 ‘각궁’의 사거리가 훨씬 길다. 양궁에서 사대와 과녁 거리는 최대 90m인데, 국궁은 145m로 정도로 55m나 멀리 나아간다. 일본의 대나무 활은 30m에 불과하다. 그는 “화학물질로 만든 양궁은 ‘죽은 활’이어서 전통 활보다 사거리射距離가 짧다.”며 “시위를 당겨보지 못한 사람은 연하고 부드러운 국궁의 맛을 도저히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얼핏 대나무를 깎아 휘어놓은 게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각궁은 여덟 가지 재료로 만들어진다. 활의 가운데 부분은 대나무, 줌통(손잡이) 부분은 참나무, 양쪽 끝에는 뽕나무를 이어 붙인다. 활 안쪽에는 소 힘줄을, 활 바깥에는 물소뿔을 붙인다. 화피(벚나무 껍질)는 모양을 다듬고 방수 역할을 하는 마감재이고, 시위가 닿는 부분에는 쇠가죽을 덧댄다. 이 모든 재료를 붙이는 풀은 민어부레를 세 시간 넘게 끓여 만든 천연 접착제다. 각궁은 1년 내내 만들어질 수 없다. 깍고, 다듬고, 말리는 6개월 과정을 거치고 3,500번의 손길을 거쳐야 만들어진다. 직접적인 제작 기간은 4개월 남짓이다. 날이 따뜻한 여름에는 풀이 물러져서 접착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재료들을 준비하고 다듬는 기간이다. 추석이 지나면서 풀을 먹이기 시작해서 겨울에 궁이 만들어진다.

각궁을 쏘는 모습
<각궁을 쏘는 모습>
전통문화를 계승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낸 활은 전국에서 사용되는 국궁의 거의 40%에 달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활로 전국의 궁도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이 숱하다고 덧붙인다. 이런 그의 활 만드는 솜씨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 이후부터이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궁도에 대한 인식이 차츰 바뀌어지면서 그의 활이 진가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또한 전통공예대전 등에 출품한 작품이 수차례에 걸쳐 입선하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도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지금은 그의 막내아들 김윤경 씨가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제작기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하루종일 앉아서만 일을 하니까 다음날 되면 안 나타나더라고… 이것이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라며 허허롭게 웃는다. 취재 / 이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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