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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유산의 숨결을 찾아
작성일
2006-03-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388



한용운의 생애와 서울 그러고보니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그날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탑골공원에 들렀다.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닌데, 공원은 마침 3·1절이라고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저기 태극기가 날리고, 단체로 방문한 아이들부터, 갓쓴 할아버지들까지 공원 안은 한마디로 축제분위기였다. 그때 공원입구 독립선언서가 새겨진 부조 앞에 어떤 아주머니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분의 행색은 그날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몸빼차림에 붉은색 계통의 남루한 윗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야기인즉 ‘자신은 한용운의 딸인데, 사람들이 한용운 한용운 하면서 국가적으로 대우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보통 집회때마다 나타나는 이상한 사람의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다만 그렇게만 보기엔 행동거지가 여유가 있어 보이고, 눈빛이 아주 맑았다. 이후 3·1운동이나 탑골공원, 한용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때 그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이 친딸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사람들과 3·1운동의 33인 중에서 그나마 변절하지 않은 몇 분 중에 하나가 한용운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분의 삶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용운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파편적인 기억들은 고집이 세고, 지조를 지켰으며, 총독부를 보지 않겠다고 북향집을 짓고 살았으며, 술을 좋아하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어교과서에 등장하는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쓴 분이라는 것이다. 그 시가 대단한 시인지 아직 모르겠으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것이라 그 시의 대강 얼개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탑골공원에서 아무것도 몰랐던 나 자신을 질책한다는 의미에서 서울과 관련된 한용운의 생애와 그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한용운은 연보에 따르면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고 자(字)는 정옥(貞玉:호적에 기재된 이름), 속명(俗名)은 유천(裕天), 득도 당시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萬海)이다. 어렸을 적 생활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다만 향리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4살인 1892년 결혼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나, 이후 의병에 참여했다는 것은 좀더 확인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부친이 오히려 농민군을 탄압하는 입장에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와 형이 의병에 관련되었을 개연성은 보이지만, 그가 직접 참여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이후 일설에는 한용운이 아내가 진통을 시작하자 산파를 데리러 가는 길에 홀연히 출가했다고도 하고 산후 조리를 위한 미역을 사러 나간 길로 집을 아주 나섰다는 이야기로 그의 생애를 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과장으로 보인다. 이후 27세가 되는 1905년에 백담사에서 수계를 하고 1908년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물을 시찰하였으며 1910년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였다. 이후 만주 등지를 여행하고, 여러 사찰을 돌면서 강연과 저술활동을 하다가 서울에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것은 1918년 그의 나이 40세가 되는 때이다. 이때 그는 계동 43번지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이 되었다. 1917년말까지 오세암에 있었으니 이듬해에 이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겠다. 계동 현대사옥을 지나 대동산업정보학교에서 약 50m 정도를 가면 중앙탕이라는 목욕탕 골목 두 번째 집이다. 30평 남짓한 한옥집인데, 2004년 문화재청에서 행한 서울지역의 근대문화유산 현황 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최근에 소유주가 문화재등록을 허락했다고 한다. 한용운은 이곳에서 이웃집의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나의 우거(寓居)는 계동 막바지의 여두소옥(如斗小屋)이라 지면이나 건물로 말하면 심히 협소하여 매우 갑갑할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몹시 갑갑하지 아니한 이유는 지형이 초고(稍高)하여 비교적 일광을 많이 받고, 공기가 청신하여 청풍이 시래(時來)하며 주위에 수목이 있어서 그 양음적취(凉陰滴翠)가 족히 고염(苦炎)의 번민을 소각(銷却)하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협착한 소옥에서 성하(盛夏)를 지냈으되 그다지 염열(炎熱)의 고를 감각치 못하였도다.” (『유심』3호, 「전가前家의 오동梧桐」)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발행한 『유심』도 그해 12월.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이곳은 건축적 가치가 있기보다는 한용운이 3·1운동에 참여할 당시에 거주했던 집이며 당시 강사로 있던 중앙학림 학생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다.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중앙학림은 1906년 5월 불교계에서 근대적 교육사업을 위한 중앙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하며, 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원흥사(元興寺)에 세운 불교전문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1910년 4월 불교사범학교(佛敎師範學校)로 개편되고, 1914년 불교고등강숙(佛敎高等講塾), 이듬해 중앙학림(中央學林)으로 다시 개칭하고 지금의 명륜동으로 이전하였다. 이곳은 지금의 명륜동에서 북묘의 위치를 확인케해주는 하마비를 찾아가는 골목 입구에 있는 표지석으로 그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계동 43번지 유심사(唯心社)에서 최린과 만난 한용운은 당시 대각사에 있던 백용성을 찾아가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그의 참여를 이끌었다. 대각사를 창건한 용성스님은 1911년 이미 상경하여 대중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봉익동 1번지에 설립된 대각사는 그의 포교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아침 한용운은 대각사로 달려가서 용성과 함께 태화관으로 갔다. 지금의 종로3가역 7번출구로 나와 골목으로 들어사면 대각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주변 어른들 말로는 지어진지 몇백년 되었다고 하지만 대략 1916년을 전후해서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용운은 3월 1일에 구속되어 1920년 7월 12일에야 경성지법 특별법정에서 첫 공판을 받았으며, 그해 10월 30일에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다. 그의 감옥생활은 지금의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자리인 마포형무소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공덕로타리 주변이 당시 형무소 벽돌공장이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대단위 아파트로 1962년에 준공된 마포아파트터는 당시 수감자들이 공역을 하던 야채밭이었다. 1922년 3월에 출소한 한용운은 출소한 직후 찾아온 한 기자에게 “지옥에서 쾌락을 즐겼노라”고 말했다. 그는 2개월 후 지금의 YMCA에서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열린 ?철창 철학?이란 강연을 통하여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는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을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을 흐르는 물은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린 논개의 이름은 못 씻는다”는 연설을 하였다. 지금의 안국동 40번지에 위치한 선학원에는 이곳 지하실에서 한용운과 용성이 3·1운동을 모의하였으며, 여기서 그들은 서명날인의 밀약을 하고 정화수를 떠다가 함께 발가벗고 목욕을 같이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선학원이 지어진 것이 1921년이니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다만 선학원은 한용운의 영정이 모셔진 유일한 사찰로, 설립 당시의 주요스님들로는 상월(霜月)·혜월(慧月)·만공(滿空)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로도 제공되었는데 한용운은 이곳에서 『선원』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가 성북동 심우장에 살 때 덕성여고와 풍문여고 사이에 위치한 이곳에 오기위해 성북동 뒷산 산길을 따라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용운은 1927년 항일단체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그는 신간회에서 중앙집행위원 겸 신간회 경성지회장을 맡았다. 신간회 경성지회 회관자리는 청진동 126번지로 서울관광호텔 남쪽 잉글랜드양복점 자리쯤이다. 1927년 7월 신간회 경성지회가 조직되면서 한규설의 기부로 마련된 곳이다. 이곳은 한용운과 관련된 재미난 일화가 전한다. 그가 지회장으로 있을 때 공문을 전국으로 돌려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해 온 봉투 뒷면에 일본 연호인 소화 몇날이란 글짜가 찍혀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아무 말 없이 천여장이나 되는 그 봉투들을 아궁이 속에 처넣어 태워 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그는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버리니 시원하군!” 하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훌훌 사무실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신간회가 해소된 이후 한용운은 기왕의 불교단체인 조선불교청년회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칭하고 그 단체로써 실패한 신간회의 운동을 계승하려고 했다. 조선불교청년회는 지금의 수송동 44번지로 조계사가 위치해 있다. 한용운을 총재로 하여 1927년 11월경부터 활동을 재개한 조선불교청년회와 불교여자청년회 또한 이곳에 활동 근거를 마련하였다. “스님(한용운)은 친구도 별로 없고 어떻게나 쌀쌀맞은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대개 점심공양은 각황사에서 잡수셨는데 잠자리는 사직동이나 잘 알 수 없는 곳에다 정했어요. 굳이 절에서 자는 일을 피했지요. 스님네를 중놈 중놈 하고 욕하기 일쑤였지요. 그래 여러 스님네들은 그분이 나타나면 이크 또 욕쟁이가 왔어 하고 슬슬 꽁무니를 빼는 일이 많았어요. 그때 그분은 유엽스님과 함께 직접 인쇄소에도 가서 조판이나 문선까지도 직접 하다가 직공과 다툰 일도 있었지요.” 당시 각황사(지금의 조계사) 살림을 맡았던 분의 이야기이다. 1931년 6월부터 1933년 9월까지 한용운은 『불교』지를 간행하면서 잡지 발행과 집필로 온 몸을 불태웠다. 그 와중에 1933년 55세의 나이로 진성당병원의 간호원으로 있던 유숙원과 재혼을 한다. 돈암시장에서 아리랑고개로 넘어가다보면 흥천사 입구에 이르게 된다. 흥천사는 신흥사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 한용운은 돈암동 신흥사 대웅전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한용운은 성북동 골짜기에 약 52평의 땅을 얻고 후학 동지들도 나중에 협찬을 하여 지금의 100여 평의 땅에 심우장을 짓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딸 영숙(英淑)이 태어났다. 한용운 선생이 서재로 쓰던 방에는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용운은 집을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집을 산비탈의 북향터에 지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명백히는 동북방향의 집인데, 이 위치에서는 그러한 방향의 집밖에 지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겠다. 한용운이 굳이 북향집을 고집했을 수도 있으나 이러한 이야기는 굳이 그의 행동에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는 것일 테고, 일제에 항거했던 그의 삶 자체만으로도 의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한용운은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앓아 눕는다. 이미 극도의 영양실조인 상태로 여러 약이 별 효험이 없는 상태였다. 한용운이 죽은 뒤에도 외동딸 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건너편에 자리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한용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하기도 한 것 같고, 지금은 기념관 역할을 하고 있다. 평소 심우장에 가면 건너편에 대사관저에서 일장기가 펄럭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용운은 심우장에 살 때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적에 검거되어 그 후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애국지사 일송 김동삼 선생이 별세하자 그의 유해를 인수해서 자기 방에 놓고 5일장을 지냈다. 한번은 최린이 심우장을 방문하여 딸 영숙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선생은 이 사실을 알고 몹시 화를 내며 부인과 영숙을 꾸짖었다. 그리고 영숙이 받았던 돈을 가지고 최린의 집을 찾아가 그 돈을 문틈으로 던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해 심우장에서 6월 29일 입적한 후 유해는 불교의 관례대로 화장하였다. 당시 홍제동 화장터는 일본인이 경영하고 있었으므로 김동삼선생 장례를 지냈던 한국인이 경영하는 미아리의 조그마한 화장터에서 조촐하게 엄수되었다. 이때 모두 소골(燒骨)되었으나 오직 치아만이 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았다. 이 치아는 항아리에 담겨져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근대 문화재로 등록이 예고되자 재산권 행사 제한을 우려해 건물이 철거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보다 뚜렷한 정부의 대안 마련과 더불어 국민들의 의식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국민들의 의식개혁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무책임한 모습과, 돈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무섭다. 그러나 한용운이 평생 일제에 항거하고, 금전적인 회유에 저항하며, 심우장에 살면서도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음에도 죽은 후 부채가 1백 50원에 이르렀는데, 지금 우리가 파편적으로 한용운을 기억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답답할 뿐이다. 금창영 / 우리얼 www.uriul.or.kr [문화재사랑] 2월호의 ‘경북 구미의 문화재를 찾아서’에서 구미시 도개면 다곡리에 위치해 있는 주륵사지에 남아 있는 무너진 폐탑으로 가는 여정에서 거론되었던 이정표와 문화재 안내 간판은 이미 2005년 10월에 전면 보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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