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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시대 도성의 치수 통제 시스템 수표
작성일
2008-10-02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5277



조선시대 서울 도성의 홍수통제 시스템을 구성하던 생생한 과학기술사의 유적인 수표와 수표교. 현재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으로 수표는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으로 해체되어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지만, 수표와 수표교는 조선시대 도성의 치수 통제 시스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흘러내린 청계천 즉 개천開川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청계천에 놓여 있던 많은 다리 가운데 수표교水標橋는 바로 다리 서쪽 편에 수표水標가 놓여 있어서 이 이름을 얻었다. 수표교에 자리한 수표는 개천의 수심을 측정하는 기둥으로 간단한 구조물이지만, 수표를 설치하고 운영하는 과정을 되짚어 보면 조선시대 도성의 치수治水 통제 시스템을 찾아볼 수 있다. 개천은 한성부에 살고 있던 주민들에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물길이었다. 개천은 도성 안으로 모여드는 물을 도성 밖으로 배출하는 배수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도성 내부의 사산四山과 외부의 사산四山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만큼 많은 물이 개천으로 모여들었다. 또한 개천은 한성부 주민들이 생활하면서 만들어낸 각종 구정물을 담아 오간수문 밖으로 내보내는 하수구 노릇도 하였다. 장마철이 되면 개천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넘쳐흐르는 일도 벌어졌다. 개천 인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개천이 넘쳤을 때 커다란 피해를 입었고, 또한 물을 통해 전염되는 역병이 유행할 때 가장 커다란 피해를 먼저 입었다. [b]수표의 설치와 수표교[/b]

조선 왕조 초기 세종대인 1441년 개천을 잘 다스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바로 수표였다. 수표를 설치하여 개천의 수심을 재려는 것이었다. 수심을 재기 위해 개천 바닥에 자리를 잡았는데, 바로 옆에 마전교馬廛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의 이름은 1420년(세종 2) 축조될 때 마전馬廛이 옆에 있어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다가 1441년(세종 23)에 수표가 세워지면서 이후 수표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수표는 마전교 서쪽에 얇은 돌 위에 세워졌는데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얇은 돌 위쪽을 깎아내고 나무 기둥을 붙잡아 움직이지 않게 해줄 부석趺石 2개를 세웠다. 나무 기둥은 사방이 네모난 형태이고, 쇠로 만든 갈고리로 부석에 고정시켜 두었다. 그리고 나무기둥에 척尺ㆍ촌寸ㆍ분分 단위로 길이 표시를 새겼다. 나무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척촌분尺寸分 단위까지 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수표와 측우기 제작에 사용된 척도는 주척周尺인데 주척 1척이 대략 20㎝ 정도이고, 1척=10촌=100분으로 따져보면 1분은 2㎜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b]수표 측정과 홍수 대비[/b]

측우기가 강수량의 크기를 재기 위한 것인 것처럼 수표는 우수雨水의 천심淺深을 정확하게 재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호조의 낭청이 비가 내렸을 때 하천 수심을 재어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나무로 만들었던 수표가 석제石製로 바뀐 것은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16세기 초반 중종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표교水標橋 다리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척촌尺寸의 수를 새겼다” 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는 분명히 석제 수표를 이용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수표의 석제 기둥을 보면 1척에서 10척까지 1척 단위로 눈금을 직선으로 새기고 3척, 6척, 9척에는 ㅇ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 평수平水, 대수大水라고 표시하였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 수위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보아 개천의 범람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국왕은 각도 관찰사들이 올린 우택(雨澤, 강수량) 장계를 통해 각 지역의 강우량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와 더불어 도성 내 개천의 수위 기록 보고도 받고 있었다. 수표 기록을 통해 개천의 상황을 계속 파악하면서 앞으로 나타날 모습을 예상하고 대처하고 있었다. [b]영조대 개천 준설 공사와 수표[/b] 조선 후기 도성 인구가 급증하면서 개천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결국 개천의 하상이 높아져 작은 비가 내려

도 범람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가 벌인 사업이 준천濬川 즉 개천 준설 사업이었다. 1760년(영조 36, 庚辰年)에 영조는 도성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여러 관료들과 토론을 진행하는 과정을 거쳐 준천을 시행하였다. 1760년 준천 사업을 마무리하면서 수표교 서쪽의 수표水標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후에 벌어질 준천작업에서 수표에 새긴 ‘경진지평’이라는 글자를 기준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수표는 또 다른 역할을 하나 더 맡아 수행하게 되었다. 개천에 쌓인 모래와 흙을 걷어내는 하상河床의 준설작업의 기준점 노릇도 하게 된 것이었다. 한편 세종대왕기념관에 위치한 수표에는 ‘계사갱준癸巳更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1773년(영조 49)에 대대적인 준천과 더불어 개천 석축 공사를 벌였는데, 그 때 다시 제작된 수표로 보인다. 수표교는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해체 이전되었다. 그리고 수표교라는 이름을 얻게 해준 영원한 짝꿍 수표는 1973년 멀리 떨어진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18세기 후반 영조는 준천에 위민爲民이라는 이념을 담았고, 그 과정에서 수표와 수표교도 복원하였다. 그런데 20세기 도시화에 따른 청계천 복개공사는 과연 어떤 생각에서 진행된 것이기에 수표와 수표교를 따로 나누어 이전시키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을까. ▶글_ 염정섭 전북대학교 HK연구교수 ▶사진_ 세종대왕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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