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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시풍속으로 엿보는 문화유산
작성일
2006-06-01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3218

전쟁으로 생겨난 우리의 전통 풍속

연날리기 자료제공_전남 낙안읍성 민속마을
<연날리기 자료제공_전남 낙안읍성 민속마을>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반도인 까닭에 무수한 외침을 겪었던 우리 선조들은 지혜를 모아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자 여러 가지 풍속을 만들어 다시 있을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하였다. 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하여 우리의 역사와 삶 속에 면면히 내려오는 전쟁에 관련된 풍속을 알아보고, 선조들의 나라 사랑과 지혜로움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강강술래 (강강수월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전라도 우수영은 강강술래 우리 장군 대첩지라 강강술래 장군의 높은 공은 강강술래 천추만대 빛날세라 강강술래”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인 강강술래는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와 도서지방에 널리 분포·전승되어온 집단 놀이로서 주로 8월 한가위의 세시풍속의 하나로, 지방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날에도 행하여진다. 하지만, 그 시원은 아마도 고대 부족사회의 공동축제 등과 같은 모임 때 서로 손과 손을 맞잡고 뛰어 놀던 단순한 형태의 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강강술래가 전쟁과 연관을 맺은 것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놀이를 의병술로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친 후 더욱 세상에 알려져 당시의 격전지였던 전남 남해안 일대에서 더욱 성행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강강술래는 우리나라 민속놀이 중 여성놀이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둥근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여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돌며 둥근 원을 그려나간다. 목청 좋고 소리 잘하는 사람이 맨 앞에 서서 메기는 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술래’하며 받는 소리를 한다. 처음에는 늦은 가락으로 나아가다 노랫소리도 빨라지고 춤도 빨라져서 나중에는 뛰는 것처럼 동작이 빨라진다. 일반적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원무圓舞를 추다가 흥이 나면 가운데 한 사람이 들어가 춤을 추는 남생이놀이를 비롯해 고사리꺾기, 청어엮기, 기와밟기, 꼬리따기, 덕석말이, 문지기놀이, 실바늘꿰기 등으로 변화를 주었다. 강강술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구성지고 활기찬 한마당을 이룬다. 강강술래의 노래 가사는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없고 아무 민요나 4·4조에 맞으면 부른다. 정서가 넘치는 율동적인 놀이로서 한가위 밝은 달 아래 펼쳐지는 여성들의 한 바탕 원무는 약동하는 생명력의 표상이다. 변란을 막기 위해 시작된 ‘연날리기’

안동 놋다리 밟기
<안동 놋다리 밟기>
주로 겨울철에 바람을 이용하여 연을 하늘에 띄우는 민속놀이로서 종이에 가는 대나무가지를 붙여 연을 만들고, 얼레에 감은 실을 연결한 다음 날리며 논다. 연날리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條에서 찾아볼 수 있다. 647년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자,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김유신 장군이 반란군을 평정하기 위해 연을 만들어 전략적으로 이용했다는 내용이다. 우리의 연날리기는 원래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군사적 목적으로 연을 날릴 때는 특정한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으로 필요할 때 날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연날리기를 오락으로 삼게 되고, 그것이 민속과 결합하면서 연을 날리는 시기가 고정된 듯하다. 조선 후기의 세시기歲時記에는 음력 12월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하는데, 특히 정초부터 정월 대보름 사이에 연날리기가 성행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날에는 연을 날리다가 연줄을 끊어 날려 보냄으로써 액막이를 하면서 연날리기를 마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평민들의 전쟁훈련, ‘석전石戰’ 개천이나 넓은 가로街路 등의 지형을 경계 삼아 약 수백 보 거리를 두고 일대의 주민들이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서로 돌을 던져 누가 먼저 쫓겨 달아나느냐의 여부에 따라 승부를 가리는 전통 사회의 집단놀이로서, 편전·석전놀이·돌팔매놀이라고도 한다. 석전의 유래는 맨 처음 『고구려전高句麗傳』에 나타나고 이후에도 『고려사高麗史』와 조선시대에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세종 때는 의금부에서 석전놀이를 금하였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 등 종친들이 이 놀이를 독전督戰하고 관전觀戰하여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사시에는 석전꾼들이 동원되어 큰 활약을 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을 들 수 있다.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으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혀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겼을 정도로 승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평상시에는 석전놀이를 통해 사람들은 우환을 떨칠 수 있었고 한 해의 안녕과 풍년, 그리고 질병이 없기를 기원하였다. 애국애족의 정신이 깃든 안동 놋다리밟기와 의성 기와밟기

강강술래
<강강술래>
1984년 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안동 놋다리밟기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단장한 젊은 여자들이 공주를 뽑아 자신들의 허리를 굽혀 그 위로 걸어가게 하는 놀이다. 놋다리를 놋쇠처럼 굳은 다리 또는 동교銅橋 등으로 풀이하기도 하나, 안동에서는 정월 한 달을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달이란 뜻으로서, 노달기라 하고, 이 말에서 달의 밟기놀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놋다리밟기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와 함께 청주를 거쳐 안동지방으로 피난할 때, 예천을 지나 소야천所夜川 나루터에 당도하여 나루를 건너게 되자, 마을의 부녀자들이 개울로 들어가 등을 굽히고 그 위로 공주를 건너게 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안동 놋다리밟기와 비슷한 놀이로서, 의성 기와밟기가 있다. 경상북도 의성에서 행해지는 정월 대보름의 민속놀이로서 남촌과 북촌이 각각 대열을 이루고, 대열의 맨 앞에서 꽃게(꼬께)가 서로 싸움이 붙으면 대열의 앞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 밀고 밀치는 싸움이 벌어진다. 기와밟기는 억세고 거칠고 강한 승부욕을 보여 주어 전투적이고 서민적이며 남성적인 면이 있다. 기와밟기에서 이긴 마을에는 풍년이, 진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전한다. 자료제공 _ 경북 의성문화원, 전남 낙안읍성 민속마을 글 _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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