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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림에 취해 신선처럼 살다간 천재화가 장승업
작성일
2013-12-03
작성자
국가유산청
조회수
4061

단원(檀園) 김홍도에 빗대“나도 단원 못지않다”며 자신의 호를 오원(吾園)이라고 지었다는 장승업(1843~1897). 그는 그림에 천부적 재능을 가졌으나, 틀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행동 때문에 기인(奇人)으로 불리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장승업은 여기 저기 떠돌다가 이응헌의 집에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서화를 익혔다.

장승업의 그림을 보고 놀란 주인

아니, 이걸 네가 그린 것이냐?

예, 그저 어깨 너머본 것을 따라 그렸을 뿐입니다.

장승업이 그린 그림은 당대의 어지간한 화가들도 혀를 내두를정도로 특출했다.

이런 대단한 필력은팔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소.

기량이 정말 대단하군 그래!

장승엽은 오로지 술과 그림 밖에 몰랐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의 그림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지만 모두 술값으로 탕진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니, 술 마실시간이 없구만.

장승업에 대한 소문은 궁궐까지 들어가 일자무식이던 그는 도화서 화원에까지 오르고,고종의 어명으로 병풍을 그리게 되는데…

병풍을 그리는데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술도 하루에 다섯 잔만 마시도록 하라.

어디에 매이는 것을 극히 꺼려했던 장승업은 엄한 궁궐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세 번씩이나 궁을 빠져나와 고종의 노여움을 샀다.

어명이고 뭐고,궁궐에 더는 못살겠어.

그럴 때마다 민영환이 왕에게 간곡히 청하여 위기에서 그를 구해주었다.

이런 무엄한 자를 봤나.당장 장승업을 잡아들이라.

폐하, 장승업의 행동이 괘씸하오나,본래 한 곳에 매어있지 못하는 성격 탓에 그런 것이오니 부디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이처럼 장승업 주변에는 그를 돕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승업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으며,돈이나 명예 보다는 인정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한 번은 절친하게 지냈던 오세창(1864~1953)에게 그림 한 폭을 그려주었는데…

이보게, 게의 집게다리가 왜 2개가 아니고 3개인가?

이 사람아, 다른 게 좀 있어야지. 같으면 볼 재미가 있나!

장승업은 오세창이 그림을 구하면 언제나 옷을 벗고 앉아청동기 항아리, 꺾인 꽃, 꺾인 나뭇가지를 그려주었고,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는 매번 스스로 자랑을 했다.

좀 보게나, 멋진 운치가 살아 있지 않은가?

이 사람 참, 자화자찬도 정도가 있지!

그림 그릴 때 준비된 물감 그릇이 없으면 방바닥에다 쓱쓱 물감을 풀고 채색할 때도 있었다.

세속에 얽매이기 싫어했던 그는 그림을 구하는 사람들의 사랑방과 술집을 전전하며 뜬구름같이 살다가 생을 마쳤다.

그리고~
마시고~

오원 장승업은 어스름에 피어난 분꽃에 비유되곤 한다.향이 짙고 빛깔이 화사해 사군자와는 구별되는 분꽃은 해가 질 무렵에 더욱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글·그림 유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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